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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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호
權永浩 | Yeong-ho K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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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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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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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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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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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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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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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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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삼성 라이온즈 창단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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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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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1982~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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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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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 (1990~1995)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1996)[2]
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 (1997)
영남대학교 야구부 감독 (2000~2011)
롯데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 (2013)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2015)
한화 이글스 2군 투수코치 (2016)
한화 이글스 재활군 담당코치 (2017)
경일대학교 야구부 투수 코치 (2020)
경일대학교 야구부 감독 (20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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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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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스카우트 (2011~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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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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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경리단 (1980~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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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동했던 투수이자 현 경일대학교의 투수코치. 한국프로야구 창립 멤버이며, 지도자로도 삼성, 롯데, 한화 등을 거친 KBO의 산 증인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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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건고는 1970년 야구부를 창단해 7년만에 해체한 학교라서 전국대회에서 주목할 만한 성적은 거둔 적이 없었는데, 3학년이던 1972년 팀을 대구에서 열린 문교부 장관기와 국회의장배를 우승을 이끌며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또한 경북고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기록한 것으로 유명세를 떨친 적이 있었다. 당시 전국 고교야구 최강자로 꼽히던 경북고를 상대한 것이라 상당히 이슈가 되었다한다. 대학 졸업후 실업 팀 한국화장품에서 뛰었고 육군 경리단에서 군복무 시절 1980년 공군 성무와의 실업야구 코리안시리즈 최우수선수로 선정되었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해 삼성 라이온즈 원년 멤버로 활약하였으며, KBO 사상 첫 전업 마무리 투수로 활동하였다. 속구의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체인지업과 제구력을 바탕으로 타자들을 농락했다.
KBO 초창기 당시에는 보직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고 한다. 1984년까지는 선발로 뛰다 1985년 26세이브와 통합우승, 1986년 19세이브를 통해 마무리 투수로서 등판했다. 그러나 1985년, 1986년 당시 선발에 가까운 170이닝, 140이닝을 휴식 없이 소화했기에, 혹사의 우려 또한 심했다. 그래서 체력적 부담을 이기지 못해 허리부상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재일교포 등이 합류하며 가속화된 기술적 발전을 따라 잡지 못하고 83, 84년 두시즌 연속 6승에 그치며 부진했다. 하지만 은퇴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1985년 초 미국 플로리다 베로비치 전지훈련에서 체인지업을 익히면서 활로를 찾아 그 시즌에 팀이 치른 경기의 절반에 가까운 54경기에 등판해 26세이브를 올리며 프로야구 최초의 성공적인 전담 마무리투수로 자리매김한다.
1987년에는 1986년 보다 훨씬 적은 이닝(약 90이닝) 소화해 내면서, 최고의 방어율(2.41) 기록한다.(전성기는 선발로 15승을 기록한 1982년에 가깝다.) 그러나, 1988년 노쇠화 때문인지, 3점대 후반 방어율과 7세이브를 기록한다. 1989년 19세이브를 끝으로 마무리 보직을 김상엽에게 물려주고 마운드를 떠났다.
통산 기록은 56승 49패 100세이브 방어율 3.06[4]이고, 마지막 100세이브 달성 당시에는 자신의 별명답게 '명예 소방수'가 되었다. 이 타이틀은 한참 뒤에 오승환이 물려받는다.[5]
한국프로야구 사상 첫 전업 마무리 투수로서 1985년 삼성 라이온즈 전/후기 통합 우승과 함께, 마무리 보직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으며 초창기 혹사의 문제점을 지적해주고, 분업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발전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은퇴 직후인 1990년부터 8시즌 동안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코치를 맡았다.
1997년 시즌 후 서정환 수석코치가 감독으로 승격되면서 코치진이 대거 물갈이되었는데, 권영호도 정리 대상에 끼어 있었다. 2000년부터 2011년 8월까지 모교인 영남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2003년에는 자신의 후임이었던 김상엽을 투수코치로 맞이했다.
2011년 8월 10일, 삼성 라이온즈 구단의 스카우트를 맡게 되었다. 비록 코치는 아니지만 14년 만에 삼성에 복귀했다.
2012년 11월 11일 롯데 자이언츠의 수석코치로 선임되었다. 김시진 신임 롯데 감독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영입이라는 평.
2013 시즌 종료 후 롯데 자이언츠 프런트에 의해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대신 1군 수석코치는 권두조 2군 감독이 옮겨 왔다. 그러나 2군 감독 발령 일 주일 만에 전격 보직 해임되었다. 권영호 코치가 김시진 1군 감독의 최측근이란 점 때문에 프런트와 김시진 감독 사이의 파워게임이라는 설이 퍼지고 있다. 후임 2군 감독에는 2군 배터리코치인 정인교가 내정되었다. 다만 1군에 온 권두조 수석코치도 2014년 6월에 자진사퇴했다.
최근들어 다시 삼성에 스카우터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2015 시즌부터 한화 이글스의 투수코치로 복귀하게 된다. 관련기사
2016 시즌에서는 2군 투수코치를 맡다가 2017 시즌에 재활군 담당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2017 시즌 종료 후 구단으로부터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팀을 떠나게 되었다.
2020년에 경일대학교 야구부 투수코치로 선임됐다.[6]
이후 2021년에는 허규옥 뒤를 이어 같은 경일대학교 야구부의 감독이 되었으나 2022년에 김상엽에게 지휘봉을 넘겼다.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 투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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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82
|
32
|
178⅔
|
15
(2위)
|
5
|
2
|
-
|
0.750
(2위)
|
2.37
(3위)
|
139
|
18
|
59
|
72
|
57
|
47
|
1.069
|
|
1983
|
32
|
135
|
6
|
10
|
7
(2위)
|
-
|
0.375
|
3.20
|
113
|
7
|
54
|
49
|
58
|
48
|
1.193
|
|
1984
|
29
|
127⅔
|
6
|
8
|
2
|
-
|
0.429
|
3.28
|
124
|
8
|
61
|
52
|
53
|
50
|
1.318
|
|
1985
|
54
(1위)
|
174⅔
|
6
|
6
|
26
(1위)
|
-
|
0.500
|
3.50
|
170
|
14
|
71
|
81
|
75
|
68
|
1.363
|
|
1986
|
38
|
146⅓
|
7
|
7
|
19
(2위)
|
-
|
0.500
|
2.77
|
121
|
12
|
55
|
74
|
47
|
45
|
1.189
|
|
1987
|
32
|
89⅔
|
5
|
3
|
18
(2위)
|
-
|
0.675
|
2.41
|
74
|
7
|
30
|
28
|
27
|
24
|
1.160
|
|
1988
|
29
|
72⅓
|
7
|
5
|
7
(5위)
|
-
|
0.583
|
3.73
|
61
|
5
|
41
|
24
|
32
|
30
|
1.396
|
|
1989
|
42
(2위)
|
86⅔
|
4
|
5
|
19
(2위)
|
-
|
0.444
|
3.63
|
83
|
6
|
40
|
41
|
39
|
35
|
1.408
|
|
KBO 통산
(8시즌)
|
288
|
1020⅔
|
56
|
49
|
100
|
-
|
0.533
|
3.06
|
885
|
77
|
411
|
421
|
388
|
347
|
1.246
|
완투, 완봉 기록
|
||
연도
|
완투
|
완봉
|
1982년
|
6완투
|
3완봉
|
1983년
|
5완투
|
0완봉
|
1984년
|
2완투
|
0완봉
|
1986년
|
3완투
|
1완봉
|
1988년
|
1완투
|
1완봉
|
1989년
|
1완투
|
0완봉
|
KBO 통산
|
18완투
|
5완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