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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구부

by 아기 자동차 2024.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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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구부
(Sunrin Internet High School)
창단
소속 리그
서울권
감독
박덕희[1]
우승 기록[2]
9회
홈페이지
대회
우승
준우승
4강
2회(1969, 79)
1회(1967)
3회(1971, 77, 99)
2회(1969, 80)
6회(1953, 54, 75, 79, 81, 92)
5회(1976, 85, 89, 98, 99)
5회(1963, 66, 69, 80, 2015)
3회(1976, 89, 2023)
2회(1971, 2022)
-
5회(1976, 78, 81, 91, 95)
4회(1984, 2003, 06, 10)
-
-
-

1. 개요[편집]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한국 고교야구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팀으로 고교야구의 절정기인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를 화려하게 장식한 팀이다. 하지만 동시에 무려 15차례의 메이저 4대 대회 준우승이라는 역사도 같이하는 팀이다.

2. 연혁[편집]

2.1. 1960년대의 영광[편집]

1911년부터 팀이 있었다고 하지만[3] 실질적인 야구부의 출발점은 보통 1950년대로 생각한다. 1950년대 막강했던 인천고의 아성에 도전했지만 패퇴하면서 우승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고, 그들이 비로소 정상에 올라 고교야구 무대에 이름을 알린 것은 1960년대였다. 그 출발은 현역 시절 명 포수였던 배성서와 역시 명 2루수였던 한동화의 가세로부터 출발한다. 이들이 활약하여 1963년 황금사자기를 석권하면서 선린상고의 야구 역사는 시작되었고, 이들의 활약을 보고 많은 인재들이 몰리면서 선린상고는 더욱 강해졌다.

그 결실은 1966년 황금사자기 우승, 1967년 대통령배 우승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1969년 가장 영광스러운 한 해를 맞이했다. 선린인터넷고 야구 역사를 쓸 때, 가장 화려한 것이 1980년이었다면 가장 영광스러웠던, 그래서 1980년의 선린상고보다 더 강했다는 1969년의 선린상고는 투수 유남호를 주축으로 하여 탄탄한 내야외의 야수진을 바탕으로 대통령배, 청룡기, 화랑대기, 황금사자기를 모두 석권하면서 고교무대를 천하통일하기에 이른다.

 

2.2. 도전자의 시대[편집]

1969년 천하통일에 성공한 선린상고는 1970년대는 도전자의 입장에서 시즌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1970년대 들어오면서 고교야구 무대는 경북고-대구상고가 가장 강력한 가운데 그 아성에 도전하는 도전자들이 뛰어들어 격전을 벌이는 구도였는데, 한 시대 앞의 강자였던 선린상고는 도전자의 입장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전력 자체는 나쁜 편은 아니라 4강에는 곧잘 들고 했고, 1975년과 1976년에는 2년 연속으로 전국대회 결승에 진출하였지만 아쉽게도 우승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당시 주축은 훗날 MBC 청룡의 에이스가 되는 이길환이었고, 야수진에는 OB 베어스의 주력이 되는 김광수가 있었다.

박용진[4] 감독이 부임하고 1978년 봉황대기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며 도전자로 1970년대를 만족해야 했던 것처럼 보이던 선린상고는 1979년부터 일약 다시금 강호로 부상하게 된다.

2.3. 고교야구의 아이돌[편집]

1979년 대통령배 결승에서 부산상고와 만난 선린상고는 상대 에이스 윤학길을 일찍부터 초토화시키면서 15:1의 기록적인 승리를 가져가며 우승에 성공했다. 당시 에이스가 윤석환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더 주목을 받은 선수는 당시 1학년이던 박노준. 투수와 타자 모두 재능이 빼어났고, 단정하고 샤프한 외모로 여학생들의 인기를 끌었던 박노준의 출현과 당시 절정이던 고교야구의 인기와 맞물려 선린상고, 정확히는 선린상고의 박노준은 고교야구의 아이돌이 되었다. 그리고 박노준 옆에는 그에 버금가는 실력자인 김건우가 함께 했다. 선린상은 10년만에 우승을 하게 되었다. 멤버는 3학년 3명, 2학년 3명, 1학년 3명으로 우승을 하리라는 전문가는 한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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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서운 아이들이 고등학교 2학년이 된 1980년. 비록 대통령배에서는 선동열이 이끄는 광주일고에게 패해 1회전 탈락했지만, 청룡기에서 가볍게 우승에 성공하면서 자신들의 위상을 과시했고, 그 해 최강자들이 집결한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박노준은 투수로는 무실점 호투를 펼치고, 타자로는 3안타에 선동열을 격침하는 역전 2점 홈런을 작렬하면서 선린상고에게 우승을 선사했다. 물론 1980년의 성공에는 박노준김건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지홍 등 화려하지 않아도 탄탄하게 받혀주는 수비력도 존재했기 때문에 우승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분명 박노준김건우는 너무나 화려했고, 그들이 고3이 된 1981년은 곧 선린상고의 한 해가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81년 대통령배에서는 대회 초반 김정수가 이끄는 광주진흥고에게 덜미를 잡히며 탈락하고 만다.[5] 그리고 청룡기에서 다시 결승에 오른 선린상고성준의 역투에 휘말려 경북고와 연장 11회 혈전을 벌인 끝에 패배하면서 준우승을 차지해야 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도 선린상고의 강세를 의심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고교야구 무대의 흔한 이변 정도였지, 제대로 만난다면 선린상고가 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1981년 봉황대기에서 선린상고는 예상대로 결승에 올랐고, 결승 상대는 청룡기에서 만난 경북고였다. 4강전에서 김건우의 완투로 승부를 결정낸 선린상고경북고 상대로 당연히 박노준을 출격시켰고, 1회말 공격에서 3점을 내면서 먼저 앞서 나갔다. 그러나 그 3점에는 박노준이 홈을 파고 들다가 전날 비로 인해 젖어있는 그라운드에 발목이 박혀 슬라이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발목 골절을 당하며 얻은 점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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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준의 발목골절 사건
 

고교야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부상으로 인해 선린상고는 졸지에 팀의 투타 기둥을 모조리 잃어버렸고, 전날 던진 김건우가 출격했지만, 김건우 역시 어깨 부상으로 조기 강판되면서 완전히 경기가 꼬여버리게 된다. 결국 경기는 경북고의 6:4 역전승으로 끝나며 선린상고는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이어 열린 황금사자기에서는 신일고에게 2:10 7회 콜드패를 당하며 탈락, 1981년을 무관으로 끝내야 했다.

박노준의 그 부상으로 인해 12월까지 병원에 입원했는데, 경북고의 우승 소식보다 박노준의 상태를 묻는 보도가 더 먼저 나가고, 그를 걱정한 소녀팬들의 팬레터가 쏟아지는 등, 그야말로 고교야구의 아이돌다운 인기가 여전함을 보여줬다. 어쩌면 이는 한국 고교야구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순간이자, 동시에 고교야구 인기가 여기가 정점임을 보여주는 순간이라고도 볼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동시에 고교야구는 이 선린상고 시대를 끝으로 인기가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었다.

 

2.4. 1981년 이후[편집]

1981년 이후 2015년 이전까지 선린상고-선린인터넷고는 고교무대 메이저 대회에서 4번의 준우승에 머물렀다. 1989년 장재중-서용빈-인현배가 이끄는 전력은 강해보였지만,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우승에 한이 맺힌 인천고에게 졌다. 1991년 봉황대기 결승에서 당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한 신일고에게 패하면서 준우승, 1992년 청룡기 결승에서 공주고노장진에게 역사상 최초의 결승전 노히트 노런의 굴욕을 당하며 준우승[6], 1995년 경헌호를 앞세워 봉황기 결승에 올랐지만, 충암고의 에이스 박명환의 벽을 넘지 못하고 패하면서 준우승.[7]

 

물론 전력은 나쁘지 않았다. 1998년과 1999년에는 에이스 권오준, 포수 정종수[8], 내야수 손시헌, 외야수 이종욱을 바탕으로 한 전력으로 4강에 거푸 진출했고, 그 뒤로도 윤희상, 고창성 같은 좋은 선수들이 출현해 간간히 4강에 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비록 과거의 화려함까지는 아니지만, 다행히도 급작스러운 몰락이 아니라 다소 부침을 겪는, 그리고 일종의 불운이 겹친 상태라는 점이 선린인터넷고 야구부에게는 위안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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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황금사자기에서 각각 2015년 신인드래프트에서 두산 베어스LG 트윈스의 1차지명을 받은 이영하김대현을 앞세워 20년 만에 전국대회 결승에 진출했고 35년만에 황금사자기를 품에 안았다. 이번 우승은 선린인터넷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후 첫 우승이었다.

2017년 고교야구 주말리그 전반기 서울A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주말리그 시행 후 7년만의 우승이었다. 그러나 윤석환 감독이 떠난 2018년부터는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다.

절치부심한 끝에 2022년 황금사자기에서 4강에 진출했으나 경남고에 패했고 경남고는 결승전에서 청담고에 승리를 거두며 우승을 차지했다.

2023년 2년 연속 황금사자기 4강에 진출했다. 준결승에서는 8년 전 결승에서 만났던 대구상원고에 접전 끝에 11-7로 승리하며, 강릉고를 꺾고 올라 온 부산고와 겨루게 됐다. 하지만 비로 이틀이 순연된 결승에서 3-12로 대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2024년 신세계 이마트배에선 32강까지 갔으나 세원고한테 패하며 세원고의 창단 첫 전국대회 16강 진출의 제물이 되며 탈락했다.

 

3. 사건 사고[편집]

4. 출신 선수[10][편집]

 
이름
포지션
프로입단
경력
포수
-
건국대-한일은행
내야수
-
내야수
-
기업은행-육군-기업은행
투수
-
연세대-실업 롯데
외야수
1982년 원년멤버
제일은행-OB(1982~1985)-빙그레(1986~1987)
외야수
1983년 1차지명
건국대-농협-경리단-롯데-한국화장품-MBC(1983~1984)-삼성(1985~1986)-청보/태평양(1987~1988)
투수
1982년 원년멤버
공군-한전-실업 롯데-OB(1982~1983)
내야수
1982년 원년멤버
건국대-농협-OB(1982~1992)
투수
1984년 1차지명
성균관대-OB(1984~1990)-삼성(1991)
투수
1986년 1차지명
한양대-MBC-LG(1986~1993,1997)
외야수
1986년 1차지명
고려대-OB(1986~1991)-해태(1992)-쌍방울(1993~1997)
외야수
1988년 1차지명
계명대-MBC(1988~1989)- OB(1990~1998)-LG(1999~2000)
포수
1989년 2차 3라운드
경희대-빙그레(1989~1993)-삼성(1993~1996)
외야수
고려대-LG(1990~1993)-해태(1994~1996)-삼성(1996~1998)
내야수
건국대-LG(1991~1998)-해태(1998~1999)-쌍방울(1999)-LG(2000)
내야수
단국대-LG(1994~2006)
투수
단국대-LG(1994~2000)
포수
1994년 신고선수 입단
건국대-쌍방울(1994~1999)-SK(2000~2001)-LG(2001~2003)-SK(2007)
외야수
건국대-한화(1996~2010)
투수
경성대-쌍방울(1998~1999)
투수
단국대-LG(1999~2008)-SK(2009~2014)
투수
한양대-LG(2000~2012)
외야수
제주전문대-상무(1998~2000)-LG(1998~2001)
투수
영남대-두산(2002~2008)-LG(2008~2010)-SK(2010~2015)
투수
삼성(1999~2020)
내야수
2003년 신고선수 입단
동의대-두산(2003~2013)-NC(2014~2019)
외야수
영남대-현대(2003~2005)-두산(2006~2013)-NC(2014~2018)
투수
KIA(2002~2010)-삼성(2011)-NC(2012~2015)
투수
두산(2002~2004)-NC(2012~2013)-KT(2014~2015)-넥센(2016~2017)
투수
경성대-두산(2008~2012)-NC(2013~2016)-KT(2018)
내야수,외야수
고려대-두산(2008)-LG(2008~2021)
내야수
2012년 신고선수 입단
한양대-고양 원더스(2011~2012)-LG(2012~2016)-KIA(2017~2018)
내야수,외야수
삼성(2004~2005)-고양 원더스(2012)-넥센(2012~2015)
투수
SK(2004~2020)
투수
인하대-삼성(2010~2015)
투수
2012년 군복무선수특별지명
동국대-NC(2012)-고양 원더스(2013)-KT(2014~2015)
투수
2014년 육성선수 입단
동국대-NC(2014~2017)-KT(2017~2020)
내야수
2013년 육성선수 입단
키비대-고양 원더스(2012~2013)-넥센(2013~2016)
외야수
두산(2009~2017)-NC(2018~2019)
외야수
2014년 신고선수
단국대-KT(2014~)
투수
넥센(2010~2014)
투수
연세대-KIA(2015~2021)
포수
2011년 신고선수 입단
넥센(2011)-고양 원더스(2012~2014)-넥센(2015~2017)
투수
2016년 육성선수 입단
고려대-KIA(2016~2017)
외야수
두산(2014~2019)
외야수
2015년 육성선수 입단
고양 원더스(2014)-한화(2015~2018)
내야수
KIA(2016~)
투수
LG(2016~)
내야수
넥센(2016~2018)
투수
두산(2016~)
외야수
KIA(2016~2022)-한화(2022~)
외야수
두산(2016~)
투수
LG(2017~2023)
외야수
2020년 육성선수 입단
고양 위너스(2019)-LG(2020~)
투수
LG(2018~)
내야수
LG(2018~)
포수
강릉영동대-SSG(2023~2024)
투수
KT(2020~2023)
투수
두산(2021~)
투수
LG(2022~)
투수
키움(2023~)
내야수
LG(2023)
투수
KT(2024~)
투수
두산(2024~)

[1] 아마야구계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선린중 감독을 거쳐 2017년 7월에 선린인터넷고 감독으로 부임했다.관련기사

[2] 4대 메이저 + 협회장기

[3] 1911년에 필립 질레트한성고선린상고 연합팀을 꾸려 실업연합팀과 맞붙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4] 선린상고 출신으로, 1966년 황금사자기 우승 멤버 중 한 명이었다.

[5]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김정수가 밝힌 일화로 동대문야구장 관객들이 진흥고 선수들을 보고 '진흥고가 어디 있는 학교요?','실업계 학교요?','1회전 상대가 누구요?' 질문을 하고 선린상고가 1회전 상대라고 하자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고 한다. 예상과 달리 2-0 완봉승을 거두고 다음날 김정수는 많은 팬들의 관심을 받게된다. '경기 다음날에 내가 내가 아니었어요'라고 말했다.

[6] 당시 선린의 에이스는 좌완투수 심영호였으나 단국대 진학 후 야구를 그만두었다.

[7] 4-3으로 지고 있던 9회초 선린상고 선두타자가 2-유간을 타고 넘어가는 안타성 타구를 충암고 유격수가 잡아 1루로 던졌고 아웃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비디오 판독이 있을리 만무한 때였고 슬로우 모션으로 보면 세잎이었다. 결국 관중석에서 관객 1명이 난입하고 관중들이 오물을 그라운드로 투척하며 게임이 20여분간 중단됐다.

[8] 현 KBO 심판

[9] 인터뷰 내용중 관련 사건 언급이 있다.

[10] 나무위키 등록 선수.

[11] 1976년생 이승호

[12] 문수호로 개명

[13] 김영관에서 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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