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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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필
崔映弼 | Choi Young-P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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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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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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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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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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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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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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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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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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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니콘스 (1997~2001)
한화 이글스 (2001~2010)
서울 해치 (2011)[1]
SK 와이번스 (2012~2013)
KIA 타이거즈 (201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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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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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 wiz 잔류군 투수코치 (2018)
kt wiz 2군 투수코치 (2019~2020)
kt wiz 재활군 투수코치 (2021~2022)
용인예술과학대학교 야구부 감독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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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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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전력분석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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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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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1이닝을 못 버티니 옷을 벗는 게 당연하다.
2017 시즌 중반, 은퇴를 선언하면서 남긴 말[3][4]
결국 2017년 한국시리즈 우승 순간, 최영필은 선수가 아닌 전력분석원으로서 덕아웃에 남아 그라운드에서 얼싸안고 춤을 추는 선수들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저 자리에 꼭 한 번은 서 보고 싶었는데..." 라고 말했다고.[5]
시즌이 끝나고 전력분석원으로 잔류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고향팀 kt의 잔류군 투수코치로 가게 되었다. 아마도 현장에 좀 떨어진 전력분석원보다 잔류군이라도 일단 현장에 있는 코치직이 미래를 생각하면 더 나은 선택이라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KIA팬들의 반응은 아쉽지만 고향팀에서도 코치로 잘하라는 반응이다.
2019년에는 2군 투수코치로 승격되었고 2021년에 다시 재활군 투수코치로 보직을 이동했다.
2022년 6월 14일 용인예술과학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게 되면서 kt를 떠났다. 감독 모집 공고가 나서 지원한 뒤 kt 구단 측에 알렸고, kt 구단 역시 계약 기간이 남아 있었지만 다른 자리도 아니고 감독으로 영전하는 거였다 보니 구단 차원에서 흔쾌히 보내줬다고 한다.
2023년 용인예술과학대학교 야구부를 대학야구 리그에서 4강까지 오르게 만들었다. 여담으로 선수 숫자가 적어 쉬지 않고 학생들이 경기에 나섰다고 한다.
역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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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97
|
34
|
101⅓
|
4
|
10
|
0
|
0
|
0.286
|
4.88
|
95
|
14
|
76
|
79
|
63
|
55
|
1.66
|
|
1998
|
11
|
17⅓
|
0
|
1
|
0
|
0
|
0.000
|
5.19
|
22
|
4
|
6
|
9
|
11
|
10
|
1.62
|
|
1999
|
40
|
88⅔
|
3
|
4
|
1
|
0
|
0.429
|
5.58
|
106
|
13
|
45
|
53
|
60
|
55
|
1.61
|
|
2000
|
7
|
10⅓
|
0
|
0
|
0
|
1
|
0.000
|
4.35
|
9
|
2
|
3
|
9
|
5
|
5
|
1.16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01
|
20
|
67⅓
|
4
|
4
|
2
|
0
|
0.500
|
5.48
|
64
|
7
|
38
|
43
|
43
|
41
|
1.49
|
|
2002
|
14
|
22
|
0
|
0
|
1
|
0
|
0.000
|
7.77
|
31
|
3
|
16
|
21
|
20
|
19
|
2.05
|
|
2003
|
13
|
42
|
1
|
3
|
0
|
0
|
0.250
|
6.86
|
50
|
6
|
24
|
26
|
33
|
32
|
1.67
|
|
2004
|
14
|
37
|
0
|
3
|
1
|
0
|
0.000
|
4.14
|
39
|
5
|
12
|
27
|
18
|
17
|
1.30
|
|
2005
|
40
|
112
|
8
|
8
|
5
|
0
|
0.500
|
2.89
|
109
|
9
|
36
|
72
|
41
|
36
|
1.24
|
|
2006
|
30
|
38⅓
|
2
|
3
|
0
|
11
|
0.400
|
3.05
|
34
|
4
|
17
|
34
|
13
|
13
|
1.25
|
|
2007
|
33
|
99⅔
|
5
|
5
|
2
|
1
|
0.500
|
4.33
|
120
|
7
|
43
|
48
|
50
|
48
|
1.60
|
|
2008
|
36
|
85⅔
|
7
|
8
|
0
|
3
|
0.467
|
4.73
|
98
|
4
|
41
|
48
|
50
|
45
|
1.59
|
|
2009
|
13
|
20⅓
|
0
|
2
|
0
|
0
|
0.000
|
10.18
|
31
|
4
|
11
|
11
|
23
|
23
|
2.07
|
|
2010
|
21
|
54⅓
|
1
|
4
|
1
|
0
|
0.200
|
7.45
|
84
|
13
|
25
|
26
|
46
|
45
|
1.95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12
|
46
|
53
|
2
|
1
|
0
|
5
|
0.667
|
4.58
|
52
|
7
|
12
|
40
|
27
|
27
|
1.17
|
|
2013
|
22
|
17⅓
|
0
|
0
|
1
|
3
|
0.000
|
6.23
|
24
|
2
|
9
|
11
|
15
|
12
|
1.85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14
|
40
|
53⅔
|
4
|
2
|
0
|
14
|
0.667
|
3.19
|
52
|
6
|
16
|
45
|
25
|
19
|
1.25
|
|
2015
|
59
|
63
|
5
|
2
|
0
|
10
|
0.714
|
2.86
|
57
|
8
|
10
|
51
|
23
|
20
|
1.03
|
|
2016
|
54
|
57⅓
|
4
|
3
|
2
|
10
|
0.571
|
3.61
|
74
|
6
|
11
|
54
|
26
|
23
|
1.43
|
|
2017
|
2
|
1⅓
|
0
|
0
|
0
|
0
|
0.000
|
20.25
|
5
|
0
|
1
|
1
|
3
|
3
|
4.51
|
|
KBO 통산
(20시즌)
|
549
|
1042
|
50
|
63
|
16
|
58
|
0.442
|
4.73
|
1156
|
124
|
452
|
708
|
595
|
548
|
1.51
|
- 한화 시절이었던 2005년 5월 21일[7]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고의로 빈볼을 던진 후, 심판이 퇴장을 선언하자 글러브를 냅다 집어던지고 쿨하게 걸어 나가는 장면을 연출해 필사마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참고로 빈볼을 맞은 상대는 진갑용이다. 진갑용은 2006년에 구대성의 투구에 맞았을 때 한참 선배인 구대성한테도 불만을 표시했는데[8] 정작 동갑내기인 최영필한테는 아무 소리도 못 했고 심판만 애절하게 쳐다 보았다. 최훈이 은퇴 다음날 그린 프로야구카툰 최영필 헌정편의 제목도 필사마였다.
- 1997 시즌을 마치고 24살이란 나이에 일찍 결혼하여 아들을 두고 있다.[9] 그 아들과 같이 선수로 뛰는 것이 꿈인지라 한화, SK 구단에서 은퇴 후 코치로의 기용, 프런트 전직 제의 등을 제안했으나, 싹 다 거절하고 현역 선수로 뛰었다. 그러나 아들인 최종현은 부상 등 이런저런 이유로 등판 기록이 적었던 터라(제물포고 통산 11⅔이닝) 2015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지 못했다. 하위 라운드 지명 제의도 있었지만, 경희대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최영필이 2017년 은퇴하며 아들과 같이 그라운드에 뛰겠다는 꿈은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 전술했듯 아들인 최종현도 야구선수였다. 최종현은 2018년 기준으로 경희대 4학년이며 아버지와 같이 프로에서 뛰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그러나 제물포고 시절 3년 통산 11 ⅔이닝밖에 소화하지 못한데다 대학 진학 후에도 1학년 때 9⅓이닝, 2학년 때 1⅔이닝, 3학년 때 1⅓이닝[10], 가장 중요한 4학년마저 사실상 공식전을 마감한 가운데[11] 0이닝 1볼넷 1사구에 그친 터라 사실상 지명을 받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결국 최영필이 은퇴하면서 이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실 최영필의 꿈은 아들이 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지명되는 걸 가정하고 말한 것이었다고 한다. 대학교에 가는 것을 보고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덕분에 경기를 뛰는 목표가 있어 선수생활이 연장된 건 같다고 한다.은퇴 후 인터뷰 기사 그러나 최종현은 2019 드래프트에서도 결국 지명받지 못했다. 경희대가 전국체전에 경기도 대표로 나가지만 여기에서도 등판하지 못하면서 사실상 이대로 선수 생활을 끝내게 될 듯 했으나 졸업 유예를 신청해 1년 더 대학에 남게 됐다. 그러나 신인 2차지명까지 한 대회(대학선수권)만을 남긴 시점까지 고작 2⅓이닝 투구에 그치면서 신인 지명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 이후에는 야구계를 떠나 다른 곳에서 몸을 담고 있다고 한다.
- 우승과는 유독 인연이 없었다. 현대 유니콘스 시절이던 1998년과 2000년에 소속팀 현대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지만 두 번 모두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어가지 못했고, 한화 이글스 시절이던 2006년, SK 와이번스 시절이던 2012년에 각각 한국시리즈에 나갔고 엔트리에도 들었으나 두 번 모두 준우승에 그쳤다. 2017년 시즌 중 은퇴를 선언한 뒤 그의 마지막 소속팀이었던 KIA 타이거즈가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올렸지만 이미 웨이버 공시 상태였다 보니 우승을 경험해 보지 못하고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 다만 한국시리즈 우승과 인연이 없었던 것과는 별개로 우승 반지는 가지고 있다. 현대 시절이던 1998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주장 김경기의 도움으로 엔트리에 진입하지 못한 선수들에게도 우승 반지를 지급해줬고, 은퇴 후 kt wiz 코치가 된 뒤 kt가 창단 첫 우승컵을 들어올린 2021년 한국시리즈 당시에는 2군 코치였지만 구단 차원에서 2군 선수단 및 코칭스태프 전원에게 우승 반지를 제작해 선물해줬다고 한다.
- 최영필의 동생인 최영완도 1999년부터 2004년까지 해태-KIA 타이거즈에서 좌완 투수로 활약했다.
- 2014 시즌 후 그의 모교이기도 한 경희대학교에서 비시즌 기간 자율 훈련을 하는 사진이 찍히면서, KIA 팬들에게 베테랑의 표본이라고 칭송받고 있다. 많은 나이에도 철저한 몸 관리를 보여 주는 모습에 칭송을 아끼지 않는 반응. 실제로 아들이 지명을 받지 못하고 경희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집을 경희대학교 근처로 옮겼다고 한다.
- 동생과 아들 모두 경희대학교 동문이다.
- 위의 몸 관리 덕에 2016년도 체력 테스트에서는 유일하게 면제 판정을 받았다. 즉 테스트를 따로 안 해도 된다는 판정을 받은 것.[12]
- 2014 시즌을 끝으로 류택현과 송지만이 현역 은퇴를 선언하면서 진갑용, 이병규와 함께 KBO 리그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선수가 되었다. 이들 1974년생 선수들의 생일 순서는 진갑용>최영필>이병규로 진갑용이 최고령 선수이고, 최영필은 진갑용보다 불과 5일 젊은 차고령 선수였는데 진갑용이 2015년 8월에 현역 은퇴를 선언하면서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이후 2017년 6월 은퇴를 선언할 때까지 최고령 선수였다.
- 최영필이 만약 고교 졸업 후 바로 지역연고 프로지명을 받았다면 입단했을 팀은 바로 1993년의 태평양 돌핀스이다. 2011년 이숭용이 은퇴하며 태평양 출신은 모두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 언뜻 보면 신화의 신혜성을 닮았기도 하다. 장동건과 닮은 것 같다는 이야기도 팬들 사이에서 나온다.
- 불펜으로 전천후 활약을 하는 덕에 전영록의 노래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를 패러디해서 "불펜을 쓰려면 영필로 쓰세요"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 노장 선수들이 많아 벤치 클리어링 최강 치트키로 불리던 한화 이글스 시절 당시 재밌는 사진들을 남겼다.최영필 커피타던 시절[13]
- 원래 목표는 프로야구에서 서른 살까지 해보는 것이었다고 한다. 프로 입단 이전에는 3년 내에 대한민국 최고 투수가 되는 것이었다고. 다만 프로 데뷔 초기에는 잦은 부상으로 인해 쉬는 경우도 많았다 보니, 오히려 운동을 더 열심히 했다고 한다. 이 때 몸을 만들며 열심히 한 덕택이었는지 2000년대 이후에는 큰 부상 없이 선수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고 밝혔다.
- 2024년 3월 홍우태와 같이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했다. 흰머리가 제법 생겼으나 낮은 톤의 목소리, 차분한 말투 등 미중년의 모습이 물씬 풍겼다.
- 야구 관련 인물(KBO)
- 최영완(야구선수)
- 현대 유니콘스/선수단
- 한화 이글스/선수단
- SK 와이번스/선수단
- KIA 타이거즈/선수단
- kt wiz
- kt wiz/2018년
- kt wiz/2019년
- kt wiz/2020년
[1] FA 선언 이후 프로 공백기간 동안 몸 담았다.
[2] 동생도 KIA 타이거즈에서 뛰었다. 포지션 역시 투수였으며, 이쪽은 좌완투수다. 드라마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으로 유명한 배우 최영완과 동명이인이다.
[3] 최영필을 넘어 대한민국 야구를 상징하는 명언 중 하나로, 이 발언은 1이닝을 버티지 못하는 불펜 투수들을 비판하는 데 자주 인용되는 발언이다. 골자는 40대 선수도 1이닝 막을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는데 젊은 선수들이 1이닝을 못 막아서야 되겠냐는 것.
[4] 다만 본인은 투수코치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 때 했던 말에 대해 '자신의 상황에서야 당연했던 말이나 유망주들에겐 아니다'라는 뉘앙스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은퇴 당시 최영필은 만 43세의 나이였고 당연하게도 아직까지 미래의 가능성이 남아있는 젊은 선수들과는 달리 최영필의 나이는 운동 선수로는 한참 전에 은퇴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인 만큼 더 이상의 여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
[5] 전술했듯 현대 유니콘스 시절 2번의 한국시리즈 모두 엔트리에 포함되지 않으면서 우승반지를 끼지 못했고, 올해 여름에 KIA에서 은퇴하지 않았더라면 부족한 불펜진 보완을 위해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어 그토록 고대하던 우승반지를 끼고 은퇴할 수 있었을 것이다.
[6] 은퇴한 해인 2017년 폐업했다고 한다.
[7] 정확히 6년 전인 1999년 이 날에도 구대성이 심판 판정에 항의하다 퇴장당하고 글러브를 냅다 집어던진 일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당시 상대팀 또한 삼성이었다.
[8] 고의가 아니었는데 왜 성질내냐고 마운드에서 1루에 있는 진갑용에게 화를 내면서 이야기했고 진갑용은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9] 운동선수들은 대체로 일찍 결혼하는 편이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연애스토리를 술회했는데 부인은 최영필보다 3살 연상이다. 유신고 시절 유신고가 전국체육대회/야구 고등부 경기도 대표로 참가하게 됐고 수원 야구장에서 연습할 무렵 수원 야구장 안에 사무실이 있는 경기도야구협회 여직원과 좋은 감정을 갖게 됐고 그 여직원이 지금의 부인이라고 했다.
[10] 이때 땜빵선발이라는 기회를 받았는데 1회부터 두들겨맞으면서 2회에 강판당하고 말았다.
[11] 경희대는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와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에서 모두 조기 탈락했고 주말리그(U-리그)에서 부진해 2차지명을 앞두고 열린 대학야구 U-리그 왕중왕전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12] 사실 면제라기보단 감독 동의하에 경희대 야구부원들과 훈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테스트를 받지 못한 것.
[13] 참고로 윷놀이 짤에서 2조 선수 중 가장 어린 선수는 김해님이지만, 어차피 김해님은 빠른 75년생이라 74년생인 최영필과 동기라 막내인 것은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