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에 창단하여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야구부. 성적으로는 역사 빼고 자랑할 게 없다는 것은 안자랑.[2]
일제 시대에는 휘문고 등과 함께 한국야구를 이끌었다고 하지만,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얻은 것은 1960년대였다. 이미 1961년과 1962년 2년 연속 황금사자기 결승에 올라갔지만 모두 패하면서 아쉽게 첫 우승의 기회를 놓쳤다. 하지만 1960년대의 중앙고 야구부는 꾸준한 스타들의 산실이었고, 이는 1965년 당대 최고의 투수였던 이원국과 대구에서 올라와 팀의 핵심 유격수로 성장한 이광환의 활약으로 당시 서울에서 열리던 유이한 대회인 청룡기와 황금사자기에서 모두 결승에 올라 황금사자기 우승에 성공하며 전성 시대의 절정을 이뤘다. 비록 이원국이 1966년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더 많은 우승을 일궈 내지는 못했지만, 1960년대의 중앙고 야구는 그 뒤로도 강했다.
그리고 1971년 경북고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에이스라는 평가를 받았던 윤몽룡의 등장과 함께 중앙고는 다시금 정상에 도전했다. 1971년 황금사자기 승자 결승전에서 남우식의 경북고를 격침하며 우승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지만, 이어 열린 최종 결승 1차전에서 경북고에게 패한 후, 다시 열린 2차전에서도 패하면서 아쉽게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고, 막 창설된 봉황대기 4강전에서는 신생 대광고에게 발목을 잡히면서 4강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고 3이 된 윤몽룡을 앞세운 중앙고는 기어이 1972년 청룡기에서 이선희와 황규봉이 버틴 경북고를 제압하고 통산 2번째 우승에 성공했다.관련글 참고로 윤몽룡은 건국대와 한일은행에서 선수로 뛰었지만 프로야구 출범 후 현역 선수로 활동하지 않고 1983년 OB 베어스의 2군 코치로 입단했으나 이듬해 7월 27일 백혈병으로 인해 향년 31세로 요절했다.
윤몽룡의 시대 이후, 1980년 모교 출신의 이광환이 지휘봉을 잡아 절묘한 작전 야구로 두 차례 4강에 오르면서 다시 이름을 알렸다. 비록 4강에만 두 차례 간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전력으로도 4강에 두 번 오른 것으로 인해 이광환 감독은 일약 젊은 지도자 재목으로 인정받아 프로 출범과 함께 OB 베어스에 스카우트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이후로 중앙고는 1990년대까지 긴 시간동안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90년대 송신영-홍성흔 배터리로 조금씩 성적을 내던 중앙고는 김재호를 축으로 한 탄탄한 야수층을 바탕으로 2002년과 2003년 2년 연속 봉황기 결승에 올랐지만 각각 북일고와 경남고에 패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특히 아쉬운 것은 2003년으로 이미 2002년이야 당시 4관왕을 차지한 북일고가 막강했기에 그럴 수도 있었지만[3], 김상록의 원맨쇼로 오른 경남고는 분명 전력 상 열세였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중앙고는 대통령배와 황금사자기에서 8강에 오르는 등 선수들의 전력도 충실한 편이었다.[4] 그러나 비로 인해 결승에 하루 밀리면서 전 경기 완투를 했던 경남고의 2학년 김상록에게 하루의 휴식기간이 주어졌고, 결국 경남고에게 이변을 허락하고 말았다.[5] 이후에 전력의 공백이 생겼고, 봉황대기 전에 경남고는 서울에서 열리는 대회는 모두 지역 예선 탈락으로 나가지도 못했으며, 부산에서 열리는 화랑대기에서도 1회전만 이기고 탈락했을 정도로 전력이 안 좋았다. 봉황대기의 영웅이 된 김상록은 심지어 원래 유격수였다가 투수가 없어서 급히 돌린 선수였다.
이 때의 전성기를 마지막으로 중앙고 야구부는 그리 인상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6] 결정적으로 2009년 중앙고가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된 후, 야구부에 대한 지원이 줄면서[7] 2009년 한 때 해체 직전까지 가는 등, 야구부 운영이 소극적으로 변해 항상 인상적인 성적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게 되었다. 뛸 기회를 찾기 위해 전학오는 선수도 있기는 하지만 기껏 데려 온 선수가 타 학교로 전학하는 경우도 종종 나왔다. 어렵게 스카웃한 최원태(2015년 넥센 1차지명)가 1년만에 서울고로 전학한 것이 단적인 예. 신인 지명에서도 4년제 대학을 거쳐 지명받은 최원재, 2년제 대학을 거쳐 지명받은 김지용, 박준표[8]를 빼면 순수 고졸 지명자는 2011년도의 최진호가 마지막이다.[9]
2019년 7월 9일 서울특별시교육청에서 중앙고의 자율형 사립고 지정 취소 결정을 내림에 따라 일부에서는 다시 예전처럼 투자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그렇게 될 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중앙고에 제기한 자사고 지정취소 처분 취소 청구 소송에서 중앙고가 승소했다. 공교롭게도 자율형 사립고 지정 취소 결정을 내린 조희연 교육감은 중앙고 졸업생이다.
2024년 황금사자기에서 남양주GK, 제주고를 꺾고 진출한 16강전에서 우승 후보로 꼽혔던 유신고를 5-4로 꺾고 2009년 황금사자기 이후 15년 만에 전국대회 8강에 올랐으나, 대구상원고에게 2-5로 패했다.
- 중앙고등학교 출신 SBS 배성재 아나운서에 의하면, 95년 청룡기 4강에 진출했을 때 교장 선생님이 휴교령(!!!)을 내렸다고 한다. 문제는 상대가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고 선발투수가 2학년이었던 김병현. 당시 중앙고 응원석으로 최희섭 홈런볼이 날아와서 당시 중앙고 고3들이 분노했다고 한다.
그리고 배성재는 7회말 땡땡이...당시 일화[10][11] - 같은 유니폼 디자인[12]을 고수하고 있다. 최근에는 제2유니폼으로 적색 유니폼이 있으며, 같은 재단인 고려대학교 야구부와 느낌이 비슷하다.[13]
- 2022년 9월 모교 출신 남인환 전 키움히어로즈 스카우트 팀장이 감독으로 부임했다.[홍윤표의 휘뚜루마뚜루] 중앙고 남인환 감독, ‘바람직한 고교야구 지도자상(像)’의 표본
- 이조영(1971~1973)
- 하갑득(1974~1975)
- 김옥수(1976)
- 김원영(1977)
- 이광환(1978~1981)
- 사경만(1982~1983)
- 이강민(1984)
- 이원영(1985)
- 이원녕(1986~1987)
- 사경만(1988~1993)
- 유대성(1994~1997) - 중앙고 졸업(65회)
- 조윤식(1998~2005) - 중앙고 졸업(56회)[14]
- 계형철(2005~2006) - 중앙고 졸업
- 고형욱(2006~2007) - 광주진흥고 졸업
- 오성규(2007~2009) - 중앙고 졸업(73회)
- 김승수(2009~2014) - 중앙고 졸업(64회)
- 서효인(2014~2022) - 신일고 졸업
- 남인환(2022~현임) - 중앙고 졸업(85회)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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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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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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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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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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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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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오리온스(1966~1967)-프레즈노 자이언츠(1968~1969)-잭슨빌 선즈(1970)-
피라타스 데 사비나스(1972~1973)-사라페로스 데 살티요(1973)-미네로스 데 코아우일라
(1974~1979)-아세레로스 데 몬클로바(1980)-페트롤레로스 데 포사 리카(1980~1982)
-MBC(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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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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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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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한일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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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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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원년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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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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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원년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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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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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장품(실업야구) - 빙그레(1986~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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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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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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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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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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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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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한화(2001~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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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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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아마추어 자유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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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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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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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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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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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2000~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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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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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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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신고선수 입단 (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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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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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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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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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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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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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신고선수 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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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SK(2008~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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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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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넥센/키움(2009~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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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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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신고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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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롯데(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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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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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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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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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신고선수 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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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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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2007~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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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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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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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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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신고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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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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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신고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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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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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신고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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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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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신고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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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201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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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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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대-KIA(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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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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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201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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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대 메이저 + 협회장기
[2] 주변 경복고등학교도 야구부가 있었으나 1962년도를 끝으로 해체.
[3] 북일고는 그 해 광주일고에 패해 대통령배 준우승에 그쳤지만, 황금사자기 우승, 화랑대기 우승, 전국체전 금메달을 차지했다. 주장 겸 유격수 나주환, 투수 안영명, 김창훈, 외야수 남상준, 양승학 등 멤버가 화려했다. 봉황대기에서는 지역 라이벌 공주고를 20대3으로 대파했다.
[4] 2003년 시즌을 앞두고 세광고에서 외야수 신동천, 광주일고에서 투수 남찬섭을 보강하였다. 투수는 남찬섭 - 이문광 - 이기화, 포수 이희근, 1루수 김태우, 2루수 김지수, 3루수 전종헌, 외야수 조성주 - 이영욱 - 신동천 - 박문근 - 이탁건 등 각자의 주어진 역할을 똘똘히 수행하는 팀이었다.
[5] 왜 이변이냐면, 당시 경남고는 학부모와 코치진의 갈등으로 인해 2003년 대거 선수들이 전학을 갔다. 서동환이 신일고로 전학을 갔고, 몇몇 선수들이 한서고와 서울고로도 전학을 갔다. 참고로 이 당시 정연회에 이어 경남고의 지휘봉을 잡은 신임 감독이 이종운이다.
[6] 2007년 대통령배 4강이 최고 성적이었다. 고형욱 감독의 지도 아래, 원투펀치 노진용과 민태호(당시 이름 민성기)가 활약했다. 그해 대통령배 및 무등기 4강에 올랐으나 고형욱 감독이 중앙고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광주진흥고) 중앙고 출신 오성규로 감독이 바뀐다.
[7] 게다가 중앙고는 학교 뒷산에 성균관대학교,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및 기타 시설이 있어 운동부 연습을 위해 부지를 확장하기도 힘들다. 중앙고는 도봉구 성균관대 야구장이나 송추 고려대 야구장까지 가서 훈련하고 있다.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도 관리전환 후 비슷한 문제를 겪는 중.
[8] 그나마 김지용은 고교 졸업 후 1년 쉰 뒤 2년제 대학에 들어가 거기서도 1년 더 다녔고, 박준표도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진흥고에서 전학했고 대학도 다시 광주로 내려가서 진학(동강대)한 선수다.
[9] 최진호도 광주 출신으로 전주고로 진학했다가 고3 때 전학한 경우.
[10] 이 당시 김기무(당시 김대원)가 야구부 2학년이었다. 박명환야구TV에서 술회하기를 준결승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뒤 코칭스태프에게 맞을 줄 알았으나 상대투수가 워낙 에이스라 그냥 넘어갔다고 밝힌바 있다.
[11] 농담이 아니라 90년대 후반~00년대 초반까지 중앙고는 동대문쪽 야구 축구 응원에 전교생을 동원했다. 심지어 옆의 중앙중 학생까지 동원할 정도...그리고 배성재 아나운서같은 땡땡이는 흔한 일이었다. 안국역에서 반이 없어지고 그 다음 역에 그 반이 없어지고 해서 동대문운동장 가면 1800이 503으로 줄어드는 기적이...
[12] 검은색 모자 및 언더셔츠, 백색 상하의, 적색 교명, 적색 배번호. 인천고, 경동고도 동일한 디자인을 사용했으나 2020년 기준 두 학교 모두 유니폼이 바뀌었다. 인천고와 동대문야구장에서 시합할 때 유니폼 디자인이 완전히 같아. 선수들, 코칭스태프, 심판들, 관중들이 모두 헷갈려야 했던 장면이 연출됐다. 그 당시는 적색 얼터 유니폼이 없었다.
[13] 경남고도 디자인이 변하지 않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4] 농협 야구단의 마지막 감독. 2022년 4월 20일 사망.
[15] 나무위키 등록 선수 한정. 졸업 연도 순.
[16] 빙그레 이글스 창단 멤버
[17] 당시 신인드래프트 시점은 1998년 10월이었기 때문에 팀명이 OB 베어스였다. 이듬해 1월 홍성흔이 정식으로 입단할 시점 즈음 두산 베어스로 팀명이 변경되었다.
[18] 보스턴에서 1년 만에 방출된 뒤 2000년 대불대(현 세한대)에 진학해 졸업할 때까지 선수로 뛰었다.
[19] SBS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 야구선수 출신으로 중앙고를 거쳐 경희대학교 1학년때까지 야구를 했다. 이후 부상으로 야구를 접고 아나운서로 입사하면서 방송계에 진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