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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한양대학교 야구부

by 아기 자동차 2024.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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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야구부
(HANYANG UNIVERSITY)
창단
지역
소속
감독
우승 기록[2]
36회
역대 전적
대회
우승
준우승
7회('65, '71, '75, '79, '92, '97, '14)
5회('72, '77, '85, '06, '20)
6회('46, '76, '78, '85, '99, '01)
5회('79, '90, '91, '94, '95)
0회
0회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8회 ('66, '70, '71, '73, '80, '89, '91, '98)
8회 ('69, '74, '75, '76, '77, '90, '95, '96)
10회 ('72, '74, '76, '79, '89, '91, '94, '96, '00, '07)
7회 ('63, '66, '71, '75, '85, '88, '93)
5회 ('83, '84, '85, '89, '93)
3회 ('76, '88, '96)
 

1. 개요[편집]

대학야구에서 연세대학교 야구부, 고려대학교 야구부와 3대 전통 강자인 학교다. 전국대회 우승과 준우승 횟수도 많고, 많은 한국프로야구 선수들과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대학야구의 전통적인 명문이라 과거 및 현재 한국프로야구에 족적을 남긴 유명 야구선수들을 많이 배출했으며 이름만 대도 대단한 선수들이 많은데 예를 들어 장효조, 김일권(중퇴), 김시진, 김용남, 이만수, 이상윤(중퇴), 류중일, 성준, 김동수, 정민태, 구대성, 유지현, 박찬호(2학년 중퇴), 이경필, 심수창까지 있었다.[3]

2. 역사[편집]

1957년 한양대학교 야구부 창단 이후 해체되었다가 1961년도에 재창단되었다.

 

본래 서울캠퍼스 소속으로 서울 내 숙소와 연습장이 있었으나 2017년부터 ERICA 소속이 되었다. 야구장은 서울에 있다가 경기도 구리시에 전용구장을 지어 사용했으나 현재는 ERICA 대운동장을 전용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4] 숙소는 2인 1실에 침대가 제공되는 최신식 시설이나 전용 야구장을 갖추지 못해 안산시에서 운영하는 흙구장을 임시로 사용했었다.

3. 여담[편집]

  • 유니폼은 두 종류다. 홈은 약간 누르스름한 백색에 주황색 줄 + 남색 배번호, 원정은 하늘색에 주황색 줄 + 남색 배번호 스타일이다. 벨트는 빨간색을 착용한다. 다른 학교들은 유니폼을 중간에 변경하기도 하지만 한양대는 전통의 디자인을 고수하고 있다.
  • 한대의 유니폼 스타일과 유사한 스타일을 입는 학교가 많다. 건국대, 동아대, 인하대가 그렇다.
  • 천보성 영입 당시 체육학과 정원의 초과되어 고교야구 선수들의 입학이 어려워질거 같자, 학교측에서는 머리를 굴려서 무용과로 인원을 배정해 입학했으며 1학년을 마치고 체육학과로 전과했다. 구대성은 관광학과로 입학했다. [5] 현재는 이와 같은 관행은 사라지고 체육계열에만 입학하고 있으며 운동부를 운영하는 모든 대학 공통으로 1999년도 입학생부터 적용되고 있다.
  • 천보성 감독이 재직 당시 입학 미끼 금품수수 사건이 터져 천감독 본인은 징역을 선고받았고, 부인은 자살하는 일이 있었다.
  • 현재 선수 선발 권한은 코칭스태프에 없고 학교에서 선발한 다음 코칭스태프에 통보하는 방식이다. 거포타자가 필요한데 기동력 좋은 소총타자들이 입단하는 경우도 있다고..
  • 대구 지역 대학은 아니지만 삼성 라이온즈 팬덤에서 영남대학교 야구부와 더불어 성골로 취급하는 야구부 중 하나이기도 하다. 대구 지역 프랜차이즈 선수인 이만수, 김시진, 류중일. 천보성, 정현발, 김한근과 대구 출신은 아니지만 삼성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성준, 박해민 등의 선수를 배출했기 때문. 또한 프로입단은 하지 않았지만 70년대 경북고등학교 야구부의 6관왕에 앞장서며 대구 지역 아마야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에이스 남우식, 경북고의 마지막 전성기였던 1981년도 멤버인 권택재도 한대 야구부에 몸담았었다. 또한, 이승엽이 진학을 염두에 뒀었다가 나중에 고의 낙제를 했던 학교가 한양대기도 하다.[6] 거기다 한양대의 교수(校獸) 또한 사자이며 한양대의 상징색 또한 푸른색이다. 여러모로 삼성 라이온즈와 인연이 깊은 셈. 현재 한양대 출신 삼성 소속 선수는 최채흥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 심수창박해민이 위의 선수들을 언급하며 한양대 야구부는 전지훈련을 항상 대구로 갔다고 스톡킹에서 밝히기도 했다.
  • 이경필이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해서 한양대 체육부의 전통인 사자승에 대해 설명했다. 한양대 체육부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며 체조, 응원가 숙지, 그리고 얼차례까지 진행한다. 대선배인 김시진도 술회했다.#. 이경필이 신입생 시절 2학년인 박찬호가 제일 무서웠으며 훗날 이경필이 은퇴 후 박찬호를 인터뷰할 적에 본인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한 자세로 박찬호에게 질문했다고...
  • 한양대 야구부는 1,2학년이 훈련 전 김밥을 직접 만들어서 퇴계원 훈련장으로 가지고 갔다.[7] 야구부 02학번 이병규(작은 이병규)가 농구부 02학번 조성민과의 인터뷰에서 '김밥 마는 속도는 웬만한 김밥집 아주머니보다 빠를 것'이라고 술회할 정도다.#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강철민도 한양대의 김밥싸기에 대해 설명했으며 식당 어머님들이 김밥재료를 준비해놓으면 김밥말이는 선수들이 했다고 한다. 야구부 선배들 사이에 '한양대 출신 야구부 선수들은 사회에 나가도 김밥장사로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 구전됐다고 한다.
  • 김밥싸기는 스톡킹에 출연한 박해민의 언급에 따르면 자신이 신입생이었던 해부터 없어졌다고 한다. 박해민이 08학번이니 2007년까지 존속한 셈이다. 2007년까지 존속해 있었다면 07학번인 고종욱도 김밥을 말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 구대성과 심수창의 회고에 의하면 타 종목 운동부와 제3 종목으로 시합을 많이 했다고 한다. 예를들어 배구부와 야구부가 농구시합을 하거나 농구부와 야구부가 실내축구를 하는 식으로 대결하는 방식이다. 주요 운동부를 모두 운영하는 학교이고 같은 숙소 생활을 해서 가능했던 듯 하다.
  • 이종범이 연세대, 고려대, 한양대를 다 제쳐두고 건국대로 진학한 이유를 스톡킹에서 설명하면서 한양대는 '매를 가장 많이 맞는 학교''숙소 생활이 힘든 학교'라고 특징을 설명한 바 있다.
  • 야구부 숙소에는 1호실부터 7호실이 있었으며 1호실은 해당 학년들 선수들 중에서 가장 기량이 우수한 선수들만 모이는 방이었다고 한다.
  • ERICA 예체능대학 스포츠과학부 소속 이현준이 2024 KBO 신인드래프트에서 삼성 라이온즈 8라운드 지명에 호명됐다.
성명
임기
김동엽
1978~1981
배성서
1982~1985
김보연
1985~2003
이기호
2003
2004~2012
2013~2016
2017~현재

5. 학번별 출신 선수[편집]

 
출신 선수
학번
성명
72
남우식, 정현발, 천보성, 손상대, 김정수
75
77
78
이만수, 오대석, 윤광우, 이근식, 정종현
79
이승희, 장성욱
80
김경표, 전용권, 한오종, 최재학, 김이수
81
82
권택재, 김건우, 김상국, 김수길, 성준, 이바오로, 이성근, 임경택
83
김종석, 류중일, 안성수, 장태수, 조용호
84
85
김보선, 나웅, 하용석
86
김기완, 김동수, 김성일, 임형석, 정윤원, 최현준
87
88
유태영, 정민태
89
90
김신, 안경환, 유지현
91
강인권, 도명진[9], 이원식, 조태상
92
강대진, 안명성, 오중석[10], 차명주
93
강혁, 권주현, 김창희 , 이경필, 이성만, 이영주, 장석희
94
김동건, 김수관, 이학균[11], 천재영, 홍민구
95
강의권[12], 김건덕, 라형진, 박상준, 이준철, 정성열[13], 정준현, 최동진, 허진석, 홍영석
96
경헌호, 김영준, 문진기, 이승현, 임성택, 전근표, 정일영, 최철영, 홍순광
97
강상권, 박영용, 이동철, 지승민, 한훈식
98
강승현, 강철민, 김민우, 문기석, 박우호, 박재완, 전용종, 정채윤
99
고영민, 김우룡, 신민기, 정종수, 최명환, 최재익, 편성준
00
김진욱, 서정호, 심수창, 양영재, 이영수, 이정호, 임재훈, 한상준
01
구제주, 구태완, 박명옥, 박성훈, 박정배, 오승택, 원정빈, 육현수, 이윤호, 황덕찬
02
이병규, 조순권, 조용원, 최길환, 최원영
03
곽동현, 김동민, 박민철, 조동현
04
김동현, 김영관, 명정주, 박대중, 박현, 오민철, 이명환, 이성민, 최상석
05
강동진, 김남식, 김수인, 김태범, 문대헌, 박윤석, 백상진, 유영욱, 윤찬수, 이용일
06
김범중, 송명섭[14], 이해창, 전성희, 최진규
07
고종욱, 김영은, 김응래, 명재철, 옥기윤, 장동우, 정재준, 채선관
08
박해민, 성의준, 오철호, 유지창, 전주원, 조용찬, 최지운, 홍성민
09
강성수, 김용지, 김제성, 김희빈, 박재민, 조덕길
10
김재현, 백승홍, 유영현, 유지훈, 이민재, 한규현, 한수빈
11
권정웅, 김대봉, 송재현, 여진석, 황인준
12
김재민, 김희준, 소재환, 심규민, 윤준식, 이재성, 최창용, 황현준
13
김세훈, 김태수, 이선재, 이재영, 정영선, 조기현, 조영빈, 조현준
14
김상엽, 김종인, 방종배, 오흥진, 유현기, 이창엽, 최채흥, 최현성
15
이승훈, 전효배, 조현수, 최성원
16
고명신, 고우송, 김도경, 김승규, 박성현, 오재호
17
고명수, 권순덕, 김태권, 박정현, 신철안, 최석호, 허승연
18
김민재, 신준혁, 양기범, 유준혁, 전인철
19
오현수, 이민영
20
김민준, 이준재, 이현준, 조재민, 홍의성
21
김길모, 김민호, 김정원, 김준수, 이정현, 이종욱
중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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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7년부터 김한근 감독이 퇴임하면서 감독직을 이어받았다.

[2] 대통령배+전국대학야구선수권+협회장배/주말리그 왕중왕전+춘계리그+추계/하계리그+전국종합야구선수권

[3] 2012년과 2013년 기준으로 야구 구단 감독 대부분이 고려대-OB 테크를 탄 사람들인데, 여기에 한 발자국이라도 안 담근 감독 셋은(김시진, 류중일, 이만수) 죄다 한양대-삼성 테크를 탔다.

[4] 한양대학교 ERICA 대운동장이 한양대 동문의 후원을 받아 축구장과 야구장이 결합된 복합 운동장으로 리모델링되었다. 이에 따라 한양대학교 야구부가 ERICA로 최종 옮겨지게 되었다.

[5] 한양대 뿐만 아니라 연세대, 고려대 등 운동부를 운영하는 대학들이 선수 스카우트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법학과, 경제학과, 경영학과, 신문방송학과, 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과, 행정학과, 사회학과, 정치외교학과 등 체육 계통과는 전혀 관계없는 전공으로 선수들을 배정하기도 했다.

[6] 수능점수 미달. 이승엽이 한양대에 스카우트된 후 환영회에 참가했는데, 술을 강권하는 분위기에 환멸을 느껴 수능날 1교시만 치고 시험을 포기했다고 힐링캠프에 나와 밝혔다.

[7] 대표적인 김밥 주방장으로는 심수창이 있으며, 강인권, 구대성, 정민태 모두 김밥을 말았다고 한다. 이 김밥 말이를 널리 알리게 된 건 당연 심수창의 회고.

[8] 부산고 출신으로 대학야구 시절 강타자로 유명했고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으나 두터운 선수층을 뚫지 못하고 프로야구선수 생활을 일찍 접었다. 딸 이수진은 골프선수로 활동중이다.#. 스톡킹에 출연한 이종범이 대학야구 시절을 회상하면서 한양대 멤버 중의 한 명으로 언급했다.

[9] 현 장안고등학교 코치

[10] 외야수로 박찬호의 공주고 동기이다. 2013년 공주고의 대통령배 우승 당시 감독이었으며 박찬호가 준결승전과 결승전에 찾아와 공주고와 오중석을 응원한 일화가 있다.

[11] 1998년도 신인 드래프트 현대 2차 2순위 지명

[12] 1994년 청소년대표 출신. 현 KBS N SPORTS PD.

[13] 이승엽의 경북고 동기. 1999년도 신인 드래프트에서 1차지명으로 삼성에 입단했으나 1군 기록 없이 2002년 한화로 이적 후 은퇴.

[14] 송민섭의 형이다.

[15] 명예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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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야구부 No.72
김기덕
金基德 | Kim Ki-Deog
출생
국적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대한민국
학력
서울전곡초 - 청원중 - 동대문상고 - 한양대
포지션
투타
프로 입단
소속팀
SK 와이번스 (2000~2002)
지도자
SK 와이번스 2군 재활코치 (2003~2004)
SK 와이번스 2군 투수코치 (2005)
한양대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2006~2016)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직 야구선수. 쌍방울 레이더스SK 와이번스에서 뛰었던 잠수함 투수다. 현재 한양대학교 야구부 감독.

2. 선수 경력[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서울전곡초, 청원중을, 동대문상고, 한양대 사범대 영어교육과(87학번)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시절 선배로 한일은행 야구단 감독을 했던 임칠수 씨가 "계약금 적게 받고 프로에 가느니 내가 있는 실업 야구 팀인 한일은행에서 같이 뛰어 보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선수지명회의(드래프트)를 지금보다 늦은 11월[1]에 했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쌍방울 레이더스의 2차 3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한다. 연봉 1,200만원에 입단계약. 참고로 이 당시 새로 창단한 쌍방울이 신생팀 전력 지원 조치의 일환으로 먼저 10명의 선수를 특별지명으로 뽑은 뒤[2] 1,2차 지명권을 행사했기에 나름대로 높은 지명순위로 갈 수 있었다.

2.2. 프로 경력[편집]

상당히 크면서도 역동적인 투구폼을 가진 투수였지만 첫해도 2승. 둘째 해도 2승. 중간계투에서 패전조와 셋업을 오간 그저 그런 전천후 투수였으므로 성적이 부각될 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3년차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당시 2군에서 완투에 완봉도 하고 8승을 기록했다. 그런데 본인 말로는 1군 콜업을 시즌에 두 세번밖에 못 받았다고....

그리고 1994년 스토브리그에서 일본 전지훈련 도중 갑자기 2군행을 통보받고 상심해 있다가 '돈 받고 운동하는데' 라면서 마음을 비우고 야구를 하니 재미있어졌다고 한다. 어찌 보면 대인배.

 

그러다가 쌍방울 1군이 인천 원정 중 태평양 돌핀스에게 18점이나 대량실점을 하면서 급하게 콜업 연락이 왔다.[3][4]콜업을 받고 어찌어찌 한 게임 호투했다고. 잘 던지니까 중간,또 잘던지니까 마무리, 그래도 잘 던지니까 선발 제의를 받았다고(…). 그 뒤로 말년을 제외하고는 2군에 내려간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5년에는 기존 마무리였던 조규제가 팔꿈치 수술 등으로 전력에서 일찌감치 이탈하니까 가끔 선발 알바도 뛰어가면서 선발-중무리 등 쌍방울 노예 1호기(...)[5]로서 역할을 다한다.

1996년 김성근 감독이 쌍방울에 부임하고 12연승을 거두는 등 파죽지세였는데, 일구회와의 인터뷰에서 "그 전에 쌍방울 있을 때는 상대팀이 서로 우리한테 돌아가며 선발 나와서 승리투수 하려고 이기려고 했었죠." 라고 말했다. 팀이 정규리그 2위를 하면서 43경기 출전, 9승 4패 4세이브 ERA 2.40을 기록했는데 이는 선발, 중간, 마무리 등 전천후로 뛰면서 거둔 성적이었다. 본인은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이기는 맛을 알았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이듬해 1997년에는 7승 6패 ERA 5.23으로 부진했지만, 1998년에는 12승 11패 3세이브 ERA 3.52를 기록하면서 본인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자릿수 승수를 달성하게 된다.

 

1999년에는 선발 투수로 나와 150이닝을 소화해 줬으나, 쌍방울 레이더스의 상황은 모기업의 부도로 인해 지원이 거의 끊겨버리며 주전 선수들이 죄다 타팀으로 팔려간 덕분에 팀 전력은 역대 최약체였던 상황이었고,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하며 2승 12패 ERA 4.50에 그쳤다.

2000년 1월, 쌍방울이 해체되어 선수단 전원이 신생구단 SK 와이번스로 넘어가 그도 SK 소속이 되었다. 당시 신생팀이었던 SK의 전력은 해체 직전의 쌍방울 선수들을 이어받아 전 시즌과 다를 바 없었고, 주로 선발 투수로 나와 5승 10패 ERA 5.22를 기록하면서 팀 투수진을 책임졌다.[6]

2002년 시즌 후 SK에서 방출되어 쌍방울 시절 같이하였던 김성근 감독의 부름을 받고 LG 트윈스로 가려고 하였으나, 얼마 못 가 김성근이 경질당했고, 졸지에 갈 곳이 없어지자 은퇴를 선언하였다.[7]

3. 지도자 경력[편집]

은퇴 뒤 2003년부터 SK 2군 코치로 활동하다 2006년부터 모교인 한양대학교에서 투수코치를 맡았다. 2017년부터 김한근 감독이 퇴임하면서 감독직을 이어받았다.

 

4. 여담[편집]

  • 1993년부터 무릎에 통증을 느껴 역동적 투구를 하지 못해 변화구를 익혔는데 그것이 김기덕의 결정구가 된 체인지업이었다. 잠수함 투수들은 대개 체인지업, 그 중에서도 그립을 모아쥔 서클체인지업을 던지는데 반해 김기덕은 직구 그립과 같이 던지되 구속만 줄인 오리지널 체인지업을 구사했다. 이 구종으로 동시대의 좌타자들을 곧잘 돌려세우곤 했다.
  • 프로야구 매니저에서 00 김기덕은 굉장한 저코진리카드로 나왔었다. 하지만 재평가 이후로는 그 자취를 감추었지만 대신 포텐셜 카드로 96'김기덕이 나올 예정인데 그 카드의 코스트는 8코스트지만 스텟은 10코스트급의 능력치를 가지고 있기에 결국 프로야구 매니저에서의 진리 김기덕은 포텐셜 96'김기덕을 통해 이어가는 셈이다.
  • 1997시즌 이종범30-30을 달성할 때 30개째 홈런을 맞은 투수가 바로 김기덕이다. 허용투수의 조상뻘이라 봐도 무방.
  • 최근 마구마구에서 재평가를 통해 특이폼과 더불어 95, 96, 98김기덕 레어 카드가 새로 나왔는데, 유망주 카드에 특이폼 + 특수 구질(강화 포크 등)로 사용할 때 김기덕의 특이폼 또한 각광을 받으면서 레어 카드 가격이 급격히 올랐다. 심지어 스페셜 카드까지 동 나면서 새삼 게임에서의 재평가를 통해 이름을 조금씩 알리게 되었다. 쌍방울 유저로서는 카드값이 급 비싸진 것에 당황스러울 따름 여기에 2023년 5월 31일 예고된 업데이트로 체인지업 특이구종을 받게되고, 쌍방울의 블랙카드로 출시된다.

5.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완투
완봉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91
22
33⅓
0
0
2
1
0
-
4.32
35
20
6
1992
13
44⅓
0
0
2
2
0
-
3.45
39
28
16
1993
3
5⅔
0
0
0
0
0
-
14.29
18
2
3
1994
33
114
1
1
5
5
2
-
4.34
116
35
55
1995
44
(6위)
116⅓
1
0
9
7
12
(8위)
-
2.71
98
40
90
1996
43
112⅔
2
1
9
4
4
-
2.40
95
43
66
1997
25
105
1
0
7
6
0
-
5.23
110
42
49
1998
44
138
1
0
12
(9위)
11
3
-
3.52
142
35
89
1999[8]
31
150
1
0
2
12
1
-
4.50
184
42
84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완투
완봉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0
32
138
0
0
5
10
1
1
5.22
167
40
72
2001
19
67⅔
0
0
3
10
0
0
5.19
77
22
41
2002
16
23
0
0
0
0
0
0
3.13
24
8
12
KBO 통산(12시즌)
325
1048
7
2
56
68
23
1
4.11
1105
357
583

6. 관련 문서[편집]

[1] 현재는 8월 하순에 실시

[2] 이같은 신인선수 특별지명은 훗날 추가로 창단되는 NC 다이노스kt wiz의 창단 과정에서도 이뤄졌다.

[3] 태평양 돌핀스KBO 리그 역사를 통틀어서도 첫 손에 꼽히는 레전드급 물빠따 팀이었다. 심지어 그 당시 태평양 타자중 그나마 잘하는 선수라고는 김경기, 김동기, 윤덕규가 전부였고 나머지는 모두 물빠따로 악명 높았다. 그런데 이런 타선에게 18실점했으니...

[4] 하지만 기록을 보면 1994년 태평양 상대로 18실점을 한적은 없다. 단 4월 19일 20실점(....)기록은 있다. 아마 이날을 18실점으로 착각한듯.

[5] 흔히 김현욱의 1997년 포스 때문에 김현욱을 원조노예라고 생각하지만 그 전에 김현욱 역할은 이미 김기덕이 먼저 하고 있었다.

[6] 창단 첫 해였던 2000년 당시 SK 선수단은 아무리 신생팀이라고 해도 도무지 프로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신생팀 혜택으로 외국인 선수를 3명이나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44승 3무 86패 승률 0.338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최하위를 달렸을 정도였다. 타선에서는 외국인 타자 틸슨 브리또가 사실상 팀 타선을 홀로 먹여살리다시피 할 정도였고, 투수진의 경우 더욱 처참했는데, 팀 방어율은 무려 6점대였던 데다가 피홈런도 195개, 도합 847실점이나 기록하면서 완전히 박살나다시피 하였다. 그나마 여기서 쓸만했던 투수는 2000년 신인왕이었던 고졸신인 이승호와 좌완투수 오상민 정도밖에 없었다.

[7] 김성근 감독이 LG에서 경질당하지 않았다면 선수 생활을 2~3년정도 더 할 수 있었다.

[8] 당시 모기업의 부도로 인해 주전 선수들이 대거 이적하면서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또한 신생팀 SK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자. 잘 던지고도 받쳐주는 선수가 없어 패한 경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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