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
|
동국대학교 야구부 No.86
|
|
이건열
李建烈 | Gun-yeul Lee
|
|
출생
|
|
국적
|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대한민국
|
학력
|
|
포지션
|
|
투타
|
|
프로 입단
|
|
소속팀
|
해태 타이거즈 (1986~1997)
|
지도자
|
SK 와이번스 1군 타격코치 (2000)
KIA 타이거즈 2군 타격코치 (2003)[4]
LG 트윈스 1군 타격코치 (2004~2005)
KIA 타이거즈 2군 타격코치 (2007)[6]
화순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08)
KIA 타이거즈 2군 타격코치 (2009~2010)[7]
KIA 타이거즈 2군 타격코치 (2012)[9]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 (2013~)
|
본관
|
12년의 프로 경력 중 무려 7개의 한국시리즈 우승반지를 얻었을 정도로 9번 우승의 타이거즈 왕조 대부분을 경험한 프랜차이즈 멤버 중 한 명이다. 그의 야구 인생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처럼 굴곡이 심했다. 고등학교 때는 한때 야구를 그만 두기도 했고 프로에 와서는 쟁쟁한 주전 선수들이 있어 제대로 뿌리를 박은 포지션 없이 이곳 저곳을 떠돌았기 때문이다. 특히 프로 현역 시절 기대해 볼 법한 잠재력으로 평가 받는 결코 나쁜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와 같은 포지션에 하필이면 김성한, 장채근, 이호성, 장성호 등 동시대의 강자나 촉망받는 샛별들이 있어서 그들의 그림자에 가려져서 특정 포지션의 붙박이 주전으로 뛴 시간이 적었다.[11]
광주 월산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고 광주동성중학교를 거쳐 광주상고에 진학했다. 그러나 1978년 전남고등학교 야구부가 해체되고 전남고 선수 10명이 광주상고로 전학을 오면서 야구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이건열은 "전남고에서 전학 온 선수들은 선배 이순철 등이 주축이었다. 기존 선수들에 비해 실력이 월등히 좋았다"고 술회했다. 동료들보다 작고 왜소한 체격의 그는 경기에 출전할 기회가 없었으며 결국 전주상업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출전 기회는 잡았지만 선배들의 구타, 타지에서의 생활에 지쳐 결국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는 야구를 그만두고 광주로 돌아갔다.
광주에 있던 이건열을 다시 호출한 사람은 군산상고의 최관수 감독이었다.[12] 1년 유급을 택했으나 당시 유급생 출전정지 조항에 걸렸고 경기력 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13]
당시 이건열의 동료인 임동구는 4번타자 겸 유격수로 최고의 평가를 받았고 동국대 입학 조건으로 임동구와 이건열 포함 6명을 함께 받아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동기생이 타 대학으로 가겠다는 말에 오기가 생겼고 '대학 가서는 너보다 내가 더 잘하겠다'는 생각으로 어린 마음에 양 손이 다 찢어질 정도로 타이어를 쳤다고 술회했다.[14]
이건열은 그 동기생과 함께 동국대에 입학했고 대학 입학 후 기량이 급성장하며 상황이 역전됐다. 당시 김인식 동국대 감독의 신임을 얻어 1학년 때부터 경기에 출전 기회를 잡았다. 이건열은 "1학년 입학하자마자 전지훈련에 갔는데 당시 주전 1루수를 보던 김민호(롯데) 선배가 갑자기 황달에 걸렸다"며 "대신 나선 경기에서 잘했다. 4학년 때까지는 거의 주전으로 경기에 나섰다"고 말했다.
본디 포지션은 포수로 동국대 재학 시절 국가대표에도 선발되고 팀의 4번타자로 활약하며 발군의 실력을 뽐냈다. 특히 포수였음에도 발이 빨라서 1번타자로 나오는 경기도 적지 않는 등 공수주를 두루 갖춘 선수라는 평을 들었다. 기대가 높았던 호남지역 최고의 유망주였던 만큼 1차 지명을 받고 고향팀 해태의 유니폼을 입었으나 프로 입단 이후 지긋지긋한 포지션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선수 생활 내내 끼어보지 않은 글러브가 없다고 한다. 실제로 그가 프로 입단 후 공식 경기에서 경험한 포지션만 해도 포수, 1루수, 2루수, 3루수, 좌익수, 우익수 등 6개에 이른다.
신인이던 시절 1루에는 고교-대학 직속 선배 김성한이 있어 주전에서 밀렸다.[15] 본 포지션인 포수로의 전환도 해봤지만 하필 입단 동기생 장채근이 김무종의 뒤를 잇는 바람에 포수로도 많은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다. 그 대신 대학 시절 톱타자로 뛸 정도의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살려 수비 전문 선수로 유격수를 제외한 내야 전 포지션을 소화한다. 1루에서 쫓겨난 그가 다른 글러브를 끼고 내야의 모든 포지션에서 펑고를 받기도 했다고. 심지어 비공식적으로는 투수도 해본 적이 있는데 선배 김성한이 짬뽕을 사주겠다고 말하며 일찍 불러내서 경기 전 연습 때 마운드에서 배팅볼을 던진 적도 있다고 한다.[16][17]
어쨌든 김성한과 장채근에게 밀린 그가 향한 포지션은 외야수였다. 1989년과 1991년에는 주전 우익수를 맡았는데[18] 1991년 한국시리즈 때는 팀의 우승에 일조하는 대활약을 하기도 했다.[19] 1992년에는 이호성과 자리를 맞바꿔 주전 좌익수가 됐다. 그리고 김성한의 노쇠가 본격화된 1994년부터 1루수로 자리를 옮기며 꿈에도 그리던 타이거즈의 주전 1루수 자리를 맡는가 했다. 이후 해태왕조의 막바지 시절 4번타자로 활약하기도 했지만 1995년 시즌 초 LG 김태원의 투구에 얼굴을 맞고 부상당하면서 그의 야구 인생이 또 한 번 꼬이게 된다. 1996년 복귀 후 다시 야심차게 1루수 미트를 꼈지만 2차 2라운드로 영입한 고졸 신인 장성호가 등장했고 김응용 감독이 젊은 야수들을 적극 기용하는 세대교체를 단행하며 장성호와 주전 경쟁을 펼치며 자리를 위협 받다가 이듬해엔 장성호가 완전히 주전으로 자리잡으며 2군을 전전하며 쓸쓸하게 은퇴한다.[20]
이렇게 보면 이건열의 선수 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당한 가치가 있는 선수였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특히 이건열은 KBO 리그 역사상 최초의 유틸리티맨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당시 선수들의 말에 따르면 말이 좋아 유틸리티 플레이어지 사실상 떠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김성한이 없었다면 해태왕조의 1루수는 이건열이 되었을 것이며 더 큰 선수가 되었을 것이라 한다.
은퇴 후 일본으로 건너가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고[22] 2000년 SK 와이번스 창단 당시 고교 선배였던 김준환 수석코치의 부름을 받고[23][24] SK 창단 코칭스태프로 영입되며 1군 타격코치로 한 시즌을 보냈다. 그러나 2000년 시즌 종료 후 쌍방울 흔적 지우기에 나선 SK 구단이 김준환 라인의 코치들을 모조리 쳐내면서 1년만에 SK 유니폼을 벗었다.[25] 이후 2001년부터 고교 선배 김성한 감독의 부름을 받고 친정팀 해태 타이거즈의 타격코치로 영입되었다.
하지만 이 시절 지도자로써의 평가는 상당히 나빴다. 2003년까지 KIA 타이거즈의 타격코치를 맡다가, 시즌 후 LG 트윈스의 새 감독으로 부임한 해태 선배 이순철을 따라 LG 1군 타격코치로 옮겼지만 당시 한창 비밀번호를 찍고 있던 당시 감독이던 이순철과 함께 무능하다고 세트로 까였고, 결국 2005 시즌 후 LG에서 해임. 이후 2006년 시즌을 앞두고 서정환 감독의 부름을 받아 다시 KIA 타이거즈의 타격코치로 영입되었지만 KIA 타선을 죄다 말아먹었다고 욕만 먹었고,[26] 결국 팀이 최하위로 쳐진 2007년 시즌 중 2군 타격코치로 좌천당한 뒤 시즌 후 KIA와 재계약에 실패했다. 2008년 한 해 동안 잠시 화순고 감독을 역임했다가 2009년 2군 타격코치로 친정팀 KIA 타이거즈에 복귀했다. 2010년 시즌 도중 팀 타격 부진으로 코칭스태프 개편을 통해 1군 타격코치로 승격되었다.
타격코치 시절 평가가 좋지 않았던 데다가 타이거즈에서만 세 번이나 잘리고도 복귀에 성공했는데, 조범현 감독의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대표팀 전지훈련에 가서 배팅볼 투수까지 한 걸 보면 처세술과 생존비법이 상당한 인물인 듯 싶다.[27] 허나 조 감독에게 호출당해 억지로 갔다는 지피셜이 있긴 하다. 어찌됐건 인망 자체는 코칭스태프들 사이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이대수의 은인. 고교졸업 후인 2000년 1월 쌍방울 레이더스에 연습생으로 입단했으나 당시 이대수는 쌍방울 신고선수로 등록되기 전의 신분에서 쌍방울이 해체되었고, 쌍방울 선수단을 모아 SK로 재창단한 어수선한 상황이었는데 신고선수 등록 전에 구단이 해체되어 버린 상황이라 한순간에 무적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국 이대수는 고향 군산으로 내려간 뒤 현역 입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28] 이대수의 고교 선배이기도 한 이건열 코치가 "얘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하면서 연습생 테스트에 추천했고, 덕분에 SK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고 한다.
타격코치 시절에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낸 게 거의 안 보여서 팬들에게는 이강철, 백인수와 함께 역적 3인방 취급을 받았다. 술에 취해 이종범에게 은퇴 권유를 한 것을 시작으로, 2011년 후반기 타격 부진 때문에 욕을 먹었다. 특히 SK와 준플레이오프에서 21이닝 무득점에 그치면서 그야말로 최악의 분위기. 조범현 감독이 사퇴하면서 모두 짤리길 기대했으나, 선동열 감독 부임 후에도 1군 타격코치 자리를 유지하면서 끝까지 살아남아 그 처세술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2011년 KIA 타격을 살리는 데 큰 공헌을 한 히라노 켄 타격 코치와 싸워서 쫓아낸 일이 알려지면서 2012년 장타력 대폭락의 주범으로 지목되며 까였다. 일설에 따르면 선수들이 일본인 코치보다는 한국인 코치를 따랐으며, 정식 보직은 2군이었지만, 감독의 지시로 1군에 동행하는 이건열 코치에 대한 히라노 코치의 항의가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기아 타선은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2012 시즌 팀 홈런 54개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개인홈런 1, 2위인 박병호(31개)와 최정(26개)를 합친 것보다 적었고, 당연히 까였다.
2012년 6월부터 수석코치 이순철의 부상으로 기아 타선을 사실상 혼자 전담하다시피하면서 더더욱 폭풍 어그로를 끌었다. 특히 그중 압권은 SK와의 2연전에서 2연속 영봉패. 결국 6월 13일자로 백인수 작전코치와 함께 2군으로 내려갔다. 1군 타격코치는 이순철 수석코치가 겸한다고 한다. 다행히 퓨처스리그 남부리그 2위를 하던 중이었던 KIA 2군은 순위변동 없이 시즌을 마쳤다.
흔히 이건열과 이강철을 무능하다는 이유로 동시에 쳐 냈다고 오해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실제로는 시즌 종료 후 코치진들과 같이 모두 제주도에서 워크샵을 가졌고 얼마 못 가서 동국대 감독으로 가게 된 것인지라, 당시 선동열 감독과 사이가 크게 틀어지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 넥센의 수석코치로 자리를 옮긴 이강철 투수코치 역시 이런 식으로 선 감독과의 관계가 나빠졌다.
공석이 된 2군 타격코치는 박철우 2군 감독이 맡게 되었으며, 동시에 한화에서 해임된 한대화가 2군 감독직으로 부임했다.
2008년 한 해만 화순고 감독으로 일했다. 특별한 건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특별히 뭔가 알려지기에는 고교야구 감독으로서 2년이라는 시간은 신입생 한 명 졸업까지 키워내지 못할 기간이라 너무 짧기도 하고. 하지만 이 때 당시의 업적은 어떤 고등학생을 투수로 전향시켰다.
2012 시즌이 끝나고, 모교인 동국대학교에서 야구부 감독으로의 오퍼가 들어오자 KIA 코치직에서 물러나 자리를 옮겼다.[29]
동국대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로는 평가가 좋아졌다. 전임 윤재호 감독의 금품수수로 인해 어수선해진 팀 분위기를 다잡고, 2013년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에서 우승을 하며 좋은 출발을 보였다. 실제로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무던한 편이라 선수들이 잘 따른다고. 한 야구부원의 말에 따르면 이런 타입의 인물이 화를 내면 더 무섭기 때문에 알아서 잘 하고 있다 한다. 춘계리그에서 홍익대를 상대로 우승한 데 이어 제68회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동의대를 꺾고 우승하며 동국대 야구부는 2013년부터 대학 최강자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향후 타 대학 선수들의 장래를 위해, 그리고 주전들이 졸업하는 내년을 대비해 2013년에 더이상의 우승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10월에 열린 전국체육대회 결승에서 단국대를 상대로 연장 끝내기 안타로 우승하며 한 해 동안 3관왕을 하는 엄청난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2014년 들어서도 주력 선수들이 졸업하고 김선현(김선빈의 동생)이 동계훈련 도중 무릎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해 휴학하고,[30] 개인적으로도 8월 중순 부친상을 당한 가운데에서도 춘계리그에서 건국대를, 제69회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 인하대를 상대로 결승에서 승리하며 연이어 제패했다. 기세를 몰아 제7회 KBO총재기 전국대학야구대회에서 경성대를 상대로 승리하며 2년 연속 전국대회 3관왕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리고 전국체전 야구부 결승에 다시 진출, 인하대를 꺾고 4관왕을 달성하며 작년 돌풍을 뛰어 넘었다. 대학야구 무대에서는 이제 완전히 지도력을 인정받은 상태다.
한편으로 2013년부터 팀을 엄청난 꼬락서니로 추락시킨 추태를 보여준 KIA 타이거즈 선동열 감독과 대비를 이루며 2014년 시즌 후 선 감독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후임 감독 후보로도 간간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선동열 감독이 재계약하고, 선동열 감독이 사퇴한 후에는 김기태 감독이 선임되며 없던 일이 되었다. 사실 KIA 팬 내부에서 이건열에 대한 여론은 팀에 있었을 시절의 무능함과 좋지 못한 뒷소문 전과 때문에 여전히 좋은 편은 아니다. 그냥 '서로 신경쓰지 말고 동국대에서 오래오래 명장으로 지내시면서 친정팀에 좋은 대학 선수들이나 공급해주시길'는 정도.
한편 동국대를 강팀으로 이끈 공로가 좋게 평가되면서 2015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의 야구 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2016년 5월 제71회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중앙대에게 승리를 거두며 팀을 2년만에 다시 정상에 올려놓았다.[31]
2016년 이후에는 해태 시절 팀메이트였던 장채근 감독이 이끄는 홍익대가 승승장구 하는 반면 동국대는 예년의 모습에는 못미치는 상황.
2014년 동국대 선수 중 2할 초반대의 타율을 기록하던 타자가 있었는데 이듬해 신인 드래프트에서 예상대로 9라운드까지 지명이 되지 못했다. 프로도 아닌 대학 야구에서 2할을 치는 타자를 데려갈 팀은 없으므로. 그 때 이건열 감독이 자신의 고향팀인 KIA 타이거즈에게 연습하는 걸 보니 재능이 있다. 아직 공격에 눈을 못 뜬 것 뿐이지 공을 못 치는 건 아니다. 수비는 매우 잘한다는 말과 함께 이 선수를 추천했다. 그리하여 이 선수는 10라운드로 KIA 타이거즈에 입단했다.[32]. 바로 이 선수가 2016년 KIA 타이거즈의 주전 중견수이자 1번 타자 김호령이다. 관련 기사 참고.
2018년부터는 동국대학교에 야구 관련 교양강좌가 개설됨에 따라 시간강사 자격으로 해당 과목의 강의를 담당하고 있다.[33]
이처럼 선수 시절에는 그저 그런 선수였고 프로 코치로서도 평판이 좋지 못했지만, 아마야구 감독으로는 2년 연속 3관왕, 4관왕이라는 실적을 남기고 좋은 선수들을 꾸준히 배출해내는 등 명지도자로서 야구인생 제2막을 성공적으로 장식하고 있다.
2021년 7월 강태원과 함께 전설의 타이거즈 녹화를 마쳤으며 8월에 방영되었다. 프로 입단 후 포지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한 이야기, 광주상고-전주상고-군산상고를 거친 떠돌이 학창시절, 김성한에게 전하는 영상편지, 김응용 감독 자택을 찾아간 일화 등을 풀어냈다.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사구
|
삼진
|
출루율
|
장타율
|
OPS
|
1986
|
25
|
.179
|
5
|
0
|
0
|
1
|
4
|
3
|
0
|
1
|
0
|
4
|
.200
|
.286
|
.486
|
|
1987
|
41
|
.216
|
16
|
2
|
0
|
1
|
4
|
11
|
0
|
5
|
1
|
10
|
.275
|
.284
|
.559
|
|
1988
|
55
|
.141
|
11
|
1
|
0
|
1
|
10
|
3
|
0
|
4
|
1
|
11
|
.191
|
.192
|
.383
|
|
1989
|
92
|
.213
|
47
|
7
|
0
|
3
|
21
|
15
|
8
|
12
|
3
|
28
|
.261
|
.285
|
.546
|
|
1990
|
89
|
.241
|
48
|
8
|
2
|
0
|
16
|
17
|
6
|
7
|
1
|
27
|
.269
|
.302
|
.571
|
|
1991
|
98
|
.228
|
61
|
8
|
0
|
2
|
26
|
32
|
5
|
29
|
4
|
35
|
.312
|
.281
|
.593
|
|
1992
|
111
|
.270
|
95
|
12
|
0
|
4
|
42
|
53
|
11
|
33
|
6
|
63
|
.341
|
.338
|
.679
|
|
1993
|
111
|
.228
|
69
|
7
|
0
|
5
|
26
|
32
|
10
|
29
|
3
|
53
|
.300
|
.301
|
.601
|
|
1994
|
106
|
.250
|
88
|
14
|
1
|
7
|
39
|
45
|
5
|
30
|
4
|
51
|
.314
|
.355
|
.669
|
|
1995
|
85
|
.295
|
81
|
9
|
1
|
2
|
27
|
28
|
5
|
14
|
1
|
53
|
.325
|
.356
|
.682
|
|
1996
|
71
|
.229
|
52
|
4
|
0
|
4
|
36
|
26
|
5
|
22
|
1
|
40
|
.298
|
.300
|
.597
|
|
1997
|
12
|
.115
|
3
|
0
|
0
|
0
|
1
|
1
|
0
|
3
|
0
|
8
|
.207
|
.115
|
.322
|
|
KBO 통산
(12시즌)
|
896
|
.240
|
576
|
72
|
4
|
30
|
252
|
266
|
55
|
189
|
25
|
383
|
.300
|
.311
|
.610
|
- 야구 관련 인물(KBO)
- 마산아재 - 외야에서 헬멧 쓰고 수비 봤다는 주인공이 바로 이건열이다.
[2] KBO에 등록된 자신의 주포지션은 내야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포수나 외야수로 출장한 경기가 있을 정도로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봐야 한다. 그의 파란만장한 포지션 변동 역사는 아래에 후술하고 있다.
[3] ~5월 18일
[4] 5월 19일~
[5] ~6월 17일
[6] 6월 18일~
[7] ~4월 27일
[8] 2010년 4월 28일~2012년 6월 12일
[9] 6월 13일~
[10] 판관공파 31세 건(建) 항렬. 아버지 이준행(李準行)은 30세 행(行) 항렬.
[11] 다만 이는 당대 슈퍼스타였던 김성한에 밀려서 이곳저곳을 전전한 이미지가 박혔던 초기의 모습에 새겨진 편견일 수 있는게 프로 생활 12년 동안 7년을 주전급으로 출전했었다. 결과적으로 크게 눈에 띄는 성적을 내지 못하고 은퇴했음에도 그가 타이거즈 왕조의 멤버로 기억되는 이유도 사실은 초반의 스토리와 후기 전성기 때는 계속 주전으로 출전했다는 이유도 있다.
[12] 군산상고 창단 초기부터 감독으로 부임하여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김종윤, 김용남, 김성한 등을 발굴했으며 이건열이 군산상고로 전학한 당시에는 백기성이 감독을 맡았다.
[13] 같은 포지션(포수)에 어깨가 더 강했던 1년 선배 장호익이 버티고 있었다. 장호익은 연세대-농협을 거쳐 뒤늦게 해태 유니폼을 입었으나 LG로 트레이드됐고 큰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프로를 떠났다. 1988 서울 올림픽 국가대표로도 막판에 선발되지 못했다.
[14] 당시 군산상고에서 동국대로 함께 진학한 선수는 강대호(우완투수), 곽현태(좌완투수), 김평호(외야수), 임동구(내야수)였다. 프로에서 살아남은 건 이건열과 김평호뿐이었다.
[15] 이건열이 회고하기를 1루 연습하러 미트를 들고 나가면 김성한이 "저리 안가" "아야. 너는 저짝(외야)으로 가라잉~"하며 내쫓았다고 한다. 김응룡 감독이 1루 연습하라고 지시해서 연습하러 왔다고 설명해도 "이 xx가" 한 마디로 제압해서 당시에는 섭섭했다고 밝혔다. 물론 그가 김성한을 제치고 1루로 나설 때도 꽤 있었는데 주전 1루수 김성한이 나태해졌다 싶으면 김응용 해태 감독이 자극요법 차원에서 김성한을 빼고 이건열이나 박철우을 투입시키기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주전은 단연 김성한이었다.
[16] 해태 선수들이 공통으로 술회하는 일화로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김성한 등 군산상고 출신 팀내 중심타자들은 타격 연습 욕심이 많아 라이브 배팅 시 배팅볼 투수가 던져주는 공을 1인당 5~7개씩 쳤다. 대기하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줘야 하나 10~20개씩 치고 넘겨주는 바람에 막내급 선수들은 5개 미만으로만 칠 수 있었고 선배들은 그새를 못참고 '야! 너 그만 나와!'하고 다그치거나 배팅 케이지 앞에서 서로 더 치겠다고 싸우기까지 했다고 한다. 김종모와 이순철은 연습량이 부족해서 결국 모교인 광주상고에 음료수와 빵을 사들고 가서 후배들이 던져주는 배팅볼을 쳤다.
[17] 김성한에게 배팅볼 던져주고 짬뽕을 먹은 건 송유석도 마찬가지였으며 김성한은 짬뽕 뿐만 아니라 짜장면, 볶음밥도 사줬고 본인이 사준 밥을 안 먹은 후배들이 없었다고 밝혔다.
[18] 다만 1989년에는 플래툰 시스템에 의해 좌타자였던 조재환과 번갈아 기용됐다.
[19] 2차전의 활약이 매우 빛났다. 참고로 이 경기는 이건열에게 그야말로 천당과 지옥을 오간 날이었는데 우익수로 선발 출전하자마자 1회초 장종훈의 평범한 우전안타 타구를 뒤로 빠뜨리면서 실점의 원흉이 됐다. 평소의 김응용 감독이었다면 극대노하면서 이건열을 빼고 다른 선수를 넣었겠지만 당시 이건열 외에 이렇다 할 대체 선수가 없었던 탓에 김 감독이 이건열을 그대로 기용했다. 이후 팀 타선은 빙그레 이글스 투수 한용덕에게 막혀 1점 차로 뒤지고 있었는데 그때 이건열이 동점과 역전을 만드는 연타석 홈런을 때려내며 자신의 실책을 그대로 만회했다.
[20] 사실 그것 말고도 팀 선배인 이순철, 고교 후배 조계현, 또 다른 팀 동료 송유석, 정회열 등과 같이 전지훈련지 하와이에서 항명사건을 일으킨 것도 한 몫 했다.
[21] 2018년 동국대학교 교양수업인 '실전야구 초급'에서 밝힌 바로는 그 전 이닝에 수비하다가 다리에 벽돌을 맞아서 머리는 보호하자는 마음으로 쓰고 나갔다고 한다.
[22] 선동렬이 주니치에 입단하면서 해태 타이거즈 코치 3명을 주니치에서 연수시켜 주는 조건을 내걸었고 김성한, 김태완(1966), 이건열이 차례대로 연수를 받았다.
[23] 정확히는 1999년 시즌 종료 후 쌍방울 레이더스의 감독으로 선임된 김준환의 부름을 받고 쌍방울의 타격코치로 영입되었다가 얼마 못 가 쌍방울이 해체되었고, 이후 선수단과 코칭스태프를 이어받아 SK로 재창단되는 과정에서 그도 SK 코칭스태프로 합류했다. 정작 이건열을 코치로 데려온 김준환 쌍방울 감독도 한 경기도 지휘해 보지 못한 채 팀이 해체되었고, 설상가상으로 SK 측에서 창단 감독으로 강병철을 선임하면서 수석코치로 1년을 보내다가 해임된다.
[24]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고교-대학-프로팀 직계 선배인 김성한의 주선으로 코치 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고 감사를 표했다.
[25] 한편 2000년 시즌 중 은퇴한 김성래가 곧바로 SK 1군 타격코치로 선임되면서 이건열의 공백을 메웠다.
[26] 당시 윤석민, 한기주, 김진우, 신용운이 버티던 투수진에 비해 팀 타선의 경우 '김기아' 라고 불릴 정도로 죄다 침체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종범은 노쇠화 기미를 보였고, 이재주와 송산이 4번타자로 나오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이 당시 KIA 타선에서 그나마 잘 쳐주던 선수가 이용규와 장성호.
[27] 이건열도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해 이런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봤다고 하며 여러 감독들이 본인을 찾아서 코치생활을 계속 할 수 있었다고 한다.
[28] 이대수는 이후 군 입대를 미루다가 결국 최종적으로 고교 시절 체벌로 인해 생긴 청각 이상 때문에 재검을 통해 군 면제를 받았다.
[29] 당시 고교,대학 야구 지도자들이 뇌물수수로 인해 줄줄이 경찰에 잡혀가면서 동국대 감독 윤재호, 배재고 감독 이광은, 한양대 감독 천보성, 연세대 감독 정진호 등의 아마추어 지도자들이 소속 팀에서 줄줄이 해임되었다.
[30] 상당히 치명적이었던지 김선현은 프로 진출을 포기하고 전공인 체육교육 방면으로 진로를 완전히 틀었다.
[31] 다만 8강전부터 결승전까지 2학년 에이스 박승수에게 3연투를 지시하고 327구를 던지게 한 것이 드러나 기존의 대학야구 지도자들과 다를 것 없이 한 선수를 혹사한 바탕에서 명성을 쌓은 게 아니냐는 비판을 모면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관련 기사를 참조. 박승수는 준수한 좌완투수였으나 혹사의 여파인지 2019년 드래프트에 미지명되었다.
[32] 103명 중 102등. 하지만 103번째로 지명된 선수(서울고 박윤철)가 연세대로 진학하면서, 사실 꼴찌
[33] 교양강의기 때문에 체육학부 학생이 아니어도 동국대 재학생이면 누구나 수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