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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by 아기 자동차 2024.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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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jor League Baseball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종목
설립
1903년 4월 16일 (121주년)
리그 창설
국가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미국 (29개 구단) |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캐나다 (1개 구단)
사무국
커미셔너
최근 우승 구단
최다 우승 구단
 

1. 개요[편집]

미국캐나다[3]의 프로 야구 리그. 전 세계 모든 야구 선수의 꿈의 무대이자 현존하는 프로 야구 리그 중 최고(, ), 세계 최초의 프로스포츠 리그로 간주되며 그 규모와 위상이 매우 큰 리그다. 또한 야구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스포츠 리그 중에서도 상업성 기준 NFL 다음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보통 줄여서 MLB 또는 빅리그(Big League)라 부르기도 하며[4] 일반적으로 ‘메이저 리그’라고 하면 보통 이것을 의미한다. 전세계의 모든 프로야구 중 가장 수준 높고 유명한 리그이자 수많은 야구 선수가 선망하는 꿈의 리그. 공식 사이트는 MLB.com. 상위(major) 리그가 있으니 하위(minor) 리그도 있기 마련, 그래서 메이저리그와 대비되는 마이너리그(MiLB)도 있다.

 

아메리칸 리그(American League)와 내셔널 리그(National League)로 구성된다. 내셔널 리그에 15개팀, 아메리칸 리그에 15개팀으로 총 30개팀이 등록되어 있으며, 29개팀은 미국연고지를 두고 있으며 토론토 블루제이스만이 캐나다 토론토를 연고로 하고 있다. 2004년까지는 캐나다에 2개팀(몬트리올 엑스포스, 토론토 블루제이스)이 있었는데 몬트리올 엑스포스워싱턴 D.C.로 연고 이전을 하여 하나로 줄어버렸다. 어쨌든 캐나다가 참여하고 있는 관계로 공식적으로는 북미 프로야구리그다.[5] 여태까지 캐나다 팀은 두 구단만 있었고 지금은 그중 한 팀밖에 안 남았기 때문에 그냥 미국 프로 야구나 다름없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메이저리그를 미국 프로 야구로 표현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 점은 캐나다 구단들이 꽤 많이 참가하고 있고 캐나다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NHL과 대조적이다.[6]

 

Take me out to the ball game,

Take me out with the crowd;

Buy me some peanuts and Cracker Jack,

I don't care if I never get back.

Let me root, root, root for the home team,

If they don't win, it's a shame.

For it's one, two, three strikes,

you're out

At the old ball game.

미국 노래 "Take Me Out to the Ball Game"의 가사,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주제가 격인 곡이다. 7이닝 스트레치라고 해서, 7회초 공격이 끝나면 교대 시간에 관중들이 모두 일어서서 오르간 반주에 맞춰 이 곡을 다같이 떼창하는 게 메이저리그의 전통.[7]

역대 MLB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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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1991
1992~2018
2019~현재
1876 ~ 2015년도까지의 메이저리그 소속 구단 로고 변천사

1857년 설립된 전미 야구 선수 협회(NABBP, National Association of Base Ball Players)는 미국 야구를 관장하는 최초의 단체였다.

1857년 16개의 뉴욕 지역 클럽들의 첫 번째 대회는 사실상 니커보커 시대를 종식시켰고, 이 기간 동안 경기 규칙은 대부분 개별 클럽들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 경기 규칙과 자체 조직을 관리하는 것 외에도, 협회는 공식적인 채점(보고), "경기" 플레이, 챔피언십, 아마추어리즘, 그리고 대회의 무결성(당시에는 하마드로밍으로 알려짐)에 대한 기준을 세웠다. 스포츠의 발전 추세에 따라, 1869년 시즌에 프로로 전향했다.

1871년에 열린 마지막 대회는 수백 명의 회원들이 국가 협회를 통해서만 대표되었고, 이는 별도의 전문 협회와 아마추어 협회의 설립을 자극했다. 1875년까지 프로 야구를 감독하고 사실상 모든 선수들을 위한 경기 규칙을 제정한 최초의 프로 스포츠 리그로 여겨진다. 아마추어 후계자가 많은 회원을 유치한 적이 없고 몇 번밖에 소집되지 않았기 때문에 NABBP는 프로 후계자와 대조적으로 "아마추어 협회"라고 불리기도 한다.

 

남북 전쟁 이전에 야구의 시작은 크리켓과 지역 변형 야구, 특히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타운볼과 뉴잉글랜드에서 열린 매사추세츠 게임과 같은 대중의 관심을 위해 경쟁했다. 1860년대에 전쟁의 도움으로 뉴욕 스타일의 야구는 다양한 군단, 연대, 여단 및 기타 부대를 통해 전국적인 경기로 확장되었다. 게다가, 민간인 NABBP는 뉴욕, 브루클린, 필라델피아에 기반을 둔 대부분의 클럽들이 남아있었지만, 통치 기구로서 진정한 국가 조직으로 확장되었다. 1865년 말, 거의 100개의 클럽이 "국가 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1867년까지 400명 이상의 회원이 있었으며, 샌프란시스코의 태평양 서부 해안에서 루이지애나의 멕시코 만 해안까지 일부 클럽이 있었다. 이러한 성장으로 인해, 지역 및 주 기관들은 스포츠의 거버넌스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야구의 폭발적인 인기는 뉴욕 근교에 핵심을 둔 NABBP 조직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870년까지 전국적으로 수천 개의 야구 클럽이 조직되었고, 그들 중 대다수는 협회 회원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남북전쟁 전날 밤에 멀리 떨어진 뉴올리언스에는 7개의 야구팀이 있었는데, 그들 중 어느 팀도 NABBP에 속하지 않았다.

NABBP는 처음에 아마추어리즘의 원칙에 따라 설립되었다. 그러나 역사 초기에도 브루클린 엑셀시어 클럽의 제임스 크레이튼과 같은 일부 스타 선수들은 비밀리에 또는 보수를 통해 보상을 받았다. 1866년 NABBP는 필라델피아 애슬레틱 클럽이 립 파이크를 포함한 3명의 선수들에게 돈을 지불한 것에 대해 조사했지만, 클럽과 선수들 모두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클럽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최고의 선수들의 서비스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비공식적인 지불이 보편화되었다. 1868년 12월 NABBP 회의에서 NABBP는 다음 1869년 시즌을 위한 프로 부문을 설립했고, 선수들에게 돈을 지불하기를 원하는 구단들은 제재 없이 자유롭게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신시내티의 레드 스타킹스는 가장 먼저 그렇게 선언한 선수들이며, 최고의 가용 선수들을 영입하는데 가장 공격적인 선수들 중의 하나였다. NABBP의 가장 강력한 팀들을 포함한 12개의 클럽들이 1869년 시즌에 프로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중요한 문제는 챔피언십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와 선수들이 한 팀에서 다른 팀으로 뛰어드는 것을 규제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3년간의 실험 끝에 1871년에 대부분의 주요 프로 구단들이 해체되어 독립된 프로 야구 선수 협회(NAPBBP, National Association of Professional Base Ball Players)를 설립했다. 초기 NABBP는 주 및 지역 통합으로 해체되기 전에 약 2년 동안 더 지속되었다.

전미 프로 야구 선수 협회(NAPBBP)는 프로 야구 최초의 스포츠 리그이다. NA는 1871년에 설립되었고 1875년까지 계속되었다. 1869년, 이전에 아마추어였던 전미야구선수협회는 일부 팀들이 선수들에게 돈을 지불하고 있다는 우려에 대응하여 프로 부문을 설립했다. 신시내티 레드 스타킹스는 완전한 프로가 되고 싶다는 그들의 열망을 선언한 첫 번째 팀이었다. 다른 팀들도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1871년, 아마추어 협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기를 원하는 몇몇 클럽들이 탈퇴하여 전미 프로 야구 선수 협회를 설립하였다. 1876년, 더 강력한 중앙 조직을 원했고, NA의 6개 클럽과 2개의 독립 클럽이 내셔널 리그를 설립했다: 보스턴 레드 스타킹스, 하트퍼드, 뮤추얼, 애슬레틱, 시카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NA와 독립 클럽인 루이빌과 신시내티의 루이스 브라운 스타킹.

 

 

내셔널 어소시에이션의 수명을 제한한 요인들은 하나의 팀 (보스턴)에 의한 리그의 존재의 대부분에 대한 지배, 몇몇은 프로 야구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에 너무 작은 도시들에 놓였기 때문에 프랜차이즈의 불안정, 중앙 권한의 부족, 도박꾼들의 영향력의 의심을 포함하였다.

그러던 중 1882년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American Association)이라는 별도의 리그가 창설되고 1892년 내셔널 리그에 합병되어 총 12팀으로 리그가 진행되어 오다가 1899년 내셔널 리그에 소속돼 있던 4개의 팀이 빠져나와 1901년, 총 8개의 팀이 아메리칸 리그라는 새로운 리그를 창설해 마침내 양대 리그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때문에 현대적인 형태의 메이저리그는 1901년부터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원래는 내셔널 리그 8개 팀, 아메리칸 리그 8개 팀으로 총 16개 팀이 미국 동부와 동부에 인접한 중부 지역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며, 각 리그도 별도의 지구 구분이 없는 단일 리그로 편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리그 확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8] 여러 새로운 팀들이 창설되어 메이저리그에 참여하였고, 기존 팀들이 미국 서부 지역으로 연고지 이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리그 확대와 팀의 증가, 연고지의 이동에 따라 여러 팀들의 원정 거리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늘어나게 되자 1969년 연고지를 기준으로 서부와 동부 지구로 재편하였다. 1969년 2개 지구로 리그가 확대 되었을 때의 규모가 양대 리그 각각 10팀씩 총 20팀이었다. 이후 AL와 NL에 각각 1977년 2팀, 1993년 2팀 이렇게 각각 총 4팀씩 생겨 28팀으로 늘어났다. 1년 뒤인 1994년엔 리그 확대에 맞춰 다시 서부, 중부, 동부 지구로 재편되었다. 이에 따라 지금의 양대 리그 3개 지구 체계가 완성되었다.

초창기에는 경기 수를 못박지 않아서 140~150경기를 전후로 순위를 가리기 위해 경기 수가 들쭉날쭉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1904년 한 시즌을 한 팀당 22경기씩 치러 총 154경기(7팀×22경기)로 확정을 지으면서 정리가 되었다. 그래도 순위를 가리기 위해 1~2경기를 더하는 경우도 있었고, 어차피 순위가 이미 확정돼서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경기는 취소될 경우 그냥 생략해버리는 경우도 있었기에 실제 정확히 154경기가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9] 시즌은 4월 말에 시작하여 9월 말에서 10월 초 사이에 끝났으며, 보통 시즌이 9월 말~10월 극초면 끝났기 때문에 10월 초에 양대리그 우승팀이 격돌하는 월드 시리즈를 가지는 형태였다.

1919년 잠시 한 시즌을 한 팀당 20경기로 줄인 적이 있었는데 바로 흑역사. 이듬해 다시 22경기로 늘어나면서 154경기로 계속 진행이 되었다. 그리고 1962년 리그 확대로 각 리그의 팀이 10개로 늘어나면서 팀당 18경기씩, 총 162경기(1962년 당시, 9팀×18경기)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3월 말~4월 초에 시즌이 시작하고 10월 초에 시즌이 마무리되는 형태로 변경이 되었다. MLB는 현재까지 162경기 체제를 유지한다.

2.1. 야구는 왜 미국의 국기가 되었나[편집]

미국에서 문화적으로나 생활적으로 전미의 여가(America’s Pastime)라고 불릴 정도로 대한민국태권도, 일본유도 · 검도와 같이 야구가 미국의 국기(國技) 스포츠이다. 야구만큼 미국인들의 문화, 생활이 반영된 스포츠는 없다.

야구는 미식축구, 농구보다도 이른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에서 시작된 유일한 프로스포츠며, 20세기 초 미국의 야구 스타 베이브 루스 열풍으로 인해 미국에서 야구에 대한 인기와 메이저리그의 인지도가 전국구급으로 상승하여 미국의 국기 스포츠로 자리잡았다.[10] 베이브 루스의 신화적인 활약 덕분에 야구는 미국에서 9.11 테러 이후 2000년대 초중반까지 절대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1994년 파업, 약물 스캔들 등 누적된 악재로 인한 야구팬들의 이탈과 경기시간이 짧고, 빠르고 역동적인 스포츠를 선호하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젊은 층 팬들의 유입 감소로 미국 최고 인기 스포츠의 자리를 미식축구에 내어주게 된다.[11] 하지만 메이저리그의 120년이 넘는 긴 역사로 인해 야구는 여전히 미국의 국기 스포츠로 자리잡고 있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산업화,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냉전시대, 20세기 미국의 인종차별에 저항했던 재키 로빈슨[12] 등 오늘날의 미국이 있게 된 역사의 대부분과 함께한 것이 바로 야구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미국인들에게는 야구가 곧 미국의 역사라는 인식이 자리잡혀 있다. 그래서 야구를 알면 미국의 역사가 보인다는 말도 나올 정도로 상대적으로 국가의 역사가 짧은 미국의 역사 대부분과 함께 보냈기에 자연스럽게 미국의 국기 스포츠가 되었다. 국가 상징성에서 야구의 위상은 미국의 다른 종목들을 압도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최초의 흑인 NFL 선수(Fritz Pollard.1920년 데뷔)와 최초의 흑인 NBA 선수(Earl Lloyd와 Chuck Cooper, 1950년 데뷔)도 분명 역사에서 의미가 큰 인물들이지만, 미국 역사에서 상징성으론 단연 최초의 흑인 MLB 선수인 재키 로빈슨(1947년 데뷔)이 가장 거대하다.

또한 미국의 국기 스포츠답게 카리브해를 비롯한 중남미 국가들에게 야구가 전파되는 과정도 미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19세기~20세기 미국의 제국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재도 세계에서 야구의 인기가 높은 국가들은 주로 과거 미국의 대외관계와 관련이 있으며, 미국의 힘이 미치는 곳에는 항상 야구가 전파되었다. # 야구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유럽에서 그나마 독일이 베이스볼 분데스리가을 비롯한 야구리그가 활성화 되어있는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에 진군했던 미군에 의해 야구가 독일에 처음으로 전파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연합군 점령하 독일시기에 미군 지도자들에[13] 의해 독일에서 야구가 활성화 되었으나 군정이 끝나고 미군 지도자들이 떠나면서 독일에서 야구는 크게 정체되었다.

미국의 모든 스포츠 중 유일하게 봄-여름-가을 7개월(4월~10월)에 걸쳐 매일매일하는 프로스포츠 리그, 미국의 국기 그 자체가 바로 MLB이다. 또한 입장료와 중계료는 경기 숫자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14] 그런 의미에서 종목 특성상 많은 경기를 하기 힘들어 한 시즌에 17경기밖에 못 하는 미식축구에 비해 한 시즌 162경기, 원한다면 매일 경기를 할 수 있는 것이 야구의 특성이기 때문에 매주 일요일마다 한 경기씩 하는 미식축구는 성대한 축제 개념이라면 매일 경기를 하는 야구는 일상생활 같은 개념으로 미국인들의 삶에 각인 되어있다. 그래서 미국의 유명한 격언, 속담은 물론이고 미국인들만 쓰는 은어들도 야구용어가 굉장히 많이 쓰인다.[15]

미국인들의 문화적 동질에 관해 첨언하자면, 미식축구의 경우는 서부 개척시대 미국인들의 "땅따먹기"를 반영하여 좀 더 진취적인 성향을 나타내고, 야구의 경우는 냉전 시대에 소련과 맞붙던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상징하고 미국 특유의 자본력이 그대로 스포츠에 옮겨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야구장에 야구만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가족 단위로 피크닉을 즐기는 볼 파크 문화로 햄버거, 핫도그패스트푸드를 즐기는 미국인들의 여가 문화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또 미식축구와 야구에 반영된 미국인들의 성향도 있는데, 미식축구나 야구나 공수 기회가 공평하게 돌아가고 플레이와 플레이 사이에 텀을 두는, 이른바 '턴(turn)제 스포츠'로 기록적이고, 분석적이며[16], 긴장감 있는 것을 선호하는 심리와 동시에 미식축구의 과격한 몸싸움, 태클이나 야구의 홈런, 탈삼진과 벤치 클리어링 등 파워풀하고 경쾌한 마초적인 것을 좋아하는 취향 등 미국인들의 심리가 잘 반영되어 있는 스포츠 중 하나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역사 항목에서 왜 야구가 미국에서 인기있었는지 알 수 있다.

2.2. 흑역사: 스테로이드 시대[편집

미첼 리포트로 밝혀진 약물 스캔들로 인해 1990년대~2000년대 중후반까지 역사가 모조리 흑역사화하고 있다. 통산 최다 홈런, 한 시즌 최다 홈런약물 혐의자의 기록이며, 투수 쪽에서도 로저 클레멘스[17]가 약물 혐의자다. 마이클 조던에게 완벽하게 눌렸던 야구인기를 다시 회복시킨 마크 맥과이어새미 소사 역시 약물 복용자이며, 현존하는 최고의 인기스타 역시 약물 복용 경력자이다. 연속 무블론 기록의 마무리 투수도, 보스턴 레드삭스의 우승을 두번이나 같이 이끌었던 도미니카 출신의 다이나믹 듀오 매니 라미레즈데이빗 오티즈도, 위의 마크 맥과이어와 같이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타선을 이끌었던 호세 칸세코[18]도 전부 약물 복용 경력이 있다. 한마디로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야구팬들이 플레이를 보며 환호했던 선수들 상당수가 약물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게다가 라이언 브론의 약물 적발 이후 2000년대 데뷔한 선수들도 약물에서 깨끗한 세대가 절대 아님이 증명되었다.

이 같은 사태에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안이한 대처가 가장 큰 역할을 했는데, 웬만한 프로 스포츠계는 다들 약물 때문에 한 번씩 홍역을 치른 역사가 있다. 육상을 비롯하여[19] NBA, 유럽 프로 축구 등도 약물 관련 스캔들이 다 있었다. 다만 스캔들 이후 철저히 단속하여 지금은 많이 근절된 상태인데, 아직도 NBA와 NFL은 금지 약물 복용을 빡세게 잡는 대신 쉬쉬하고 있다는 의견이 많다. 오히려 메이저리그가 약물 파동 이후 인기가 줄어들어 큰 타격을 입는 바람에 NBA와 NFL이 더 약물을 안 잡는 방향으로 나갔고 결과적으로 선수들의 화려한 퍼포먼스의 힘으로 인기가 증가했고 팬들도 약물에 호의적인 반응이라[20] 앞으로도 약물을 안 잡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경우에는 80년대 후반 이미 선수들의 약물 복용 사례를 알고 있었고, 90년대에도 여전히 약물이 돌고 있으나 1994년 파업으로 반토막난 야구 열기 부흥을 핑계로 단속을 의도적으로 자제했다는 의혹이 강하게 일고 있다. 만일 묵인이 사실이라면 일단 소기의 목적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으나, 결국 시궁창으로 알아서 뛰어든 셈. 그래서인지 2013년 터진 바이오제너시스 스캔들에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여 관련자들에게 징계를 내렸다.

일부는 저 종목들은 운동량이 많아서 약물을 하면 신체에 부담이 되므로 선수들이 자제하게 되었고, 야구는 정적인 스포츠라서 그렇지 않다라는 주장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약물 중에는 선수의 피로 회복력만 향상시키는 약물[21]도 있고, 타자에게 힘보다 중요한 동체 시력을 향상시켜주는 약물도 있다. 즉, 약물의 효과는 무궁무진하다. 어느 종목은 약물이 만연하고, 어느 종목은 약물에서 안전하다는 시각은 위험하다.

약물 혐의자가 너무 넘쳐나다보니 사무국 입장에서는 이 선수들의 기록을 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것도 문제고[22] 뭐라고 강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 개인의 판단에 맡길 문제이지만, 그래도 그렉 매덕스, 톰 글래빈, 존 스몰츠, 데릭 지터, 랜디 존슨, 페드로 마르티네즈, 노모 히데오, 블라디미르 게레로, 프랭크 토마스, 켄 그리피 주니어, 크레익 비지오, 알버트 푸홀스, 칼 립켄 주니어, 토니 그윈, 스즈키 이치로, 트레버 호프먼, 마리아노 리베라 같은 수많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선수들이 아직까지 약물 혐의 드러난 바 없는 깨끗한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현역 메이저리거 중 이름있는 선수들 중에도 약쟁이가 아닌 자기 실력만으로 활약하는 선수들도 있다.

약물로 리그가 초토화 된 경험 때문에 현재 메이저리그의 도핑 테스트는 매우 까다롭다. 기본이 전수 조사 및 불시 검사이며, 시즌 전에도 무작위로 선수들을 선별해 혈액 검사도 진행한다. 메이저리그의 도핑 테스트 담당관은 시즌 후에도 선수들의 휴가지까지 쫓아가서 검사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이렇게 까다로운 탓인지 시즌 중, 시즌 전, 후 할 것 없이 항상 꾸준히 약물 복용자가 적발되고 있다. 그러나 철저히 단속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약물 단속에 걸리는 선수가 나온다.[23]

3. 야구인들의 꿈의 무대[편집]

미 연방법상 메이저리거는 최고 연방세율 39.6% 적용자인데 이는 미국 내에서 연 소득이 높은 의사, 변호사 등과도 어깨를 나란히 한다. 저 연방소득세법상 기준이 연소득 $418,400인데 메이저리거 최저연봉이 2022년 기준으로 $700,000이다.

즉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미국 전역에서 야구 엘리트 소리 들을 만한 사람이 된다. 최고 연방세율 적용자라는 것 그 자체가 미국에 정착한 사람으로서는 아메리칸 드림의 완성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높은 기준이며 따라서 미국 국세청에서는 최고 세율 적용자를 고급 전문직에 준하는 인원으로 간주한다. 또한 메이저리그는 전세계 스포츠 시장 중 NFL 다음으로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리는 시장성이 매우 큰 리그이며, # 2022년에만 110억 달러라는 엄청난 수익을 낸 상업성 기준 세계 2위 리그이기도 하다.[24] #

최저 연봉만으로도 최고 연방세율 적용자에다가 메이저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만 하면 연금은 물론, 의료보험, 구단에서 제공하는 뷔페식 고급 요리 등등을 제공해주니 메이저리그는 중남미 소년들에게 성공을 위한 '꿈의 무대'로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다. 특히 카리브해를 끼고 있는 많은 나라들(도미니카 공화국, 베네수엘라, 멕시코, 푸에르토리코, 쿠바 등등.)에는 오로지 메이저리그의 야구선수가 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야구사관학교까지 꽤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배가 빅리그에서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는 걸 동경하며 노력하고 있다.[25]

과거에는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야구에만 전념하던 야구소년들이 많았다. 그러나 중남미 아이들이 미국까지 빚져가면서 왔으나 정작 야구선수가 되지 못하자[26] 갱이나 도둑으로 전락하면서 미국 치안 문제로까지 이어지는 부작용이 많이 생겼다.[27] 때문에 현재는 우리나라마냥 운동선수가 꿈인 애들은 죽어라 운동만 시키는 게 아니라 선수생활이 힘들게 될 경우를 대비해 영어, 미국문화도 많이 가르치기 때문에 공부 잘하는 아이들도 많다고 한다.[28] 이는 카리브해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미국에 매우 많이 의존하기 때문이다.

카리브해 인근 국가들도 대부분 자체 야구 리그가 있고, 캐리비언 시리즈 등 국가 간의 국제전도 있으나 MLB에 비해 규모가 작고[29], 미국과 지리적, 문화적으로 차이가 적어서 거의 유망주 조공하고 있는 상태다. 또 대표적인 아마야구 최강이라 불리는 쿠바는 프로리그가 없고 실업리그가 있지만[30] 실업리그에 출전해서 버는 돈이 적고, 미국으로 가서 메이저리그 진출을 하면 수십-수백년치 봉급을 벌어들일 수 있기 때문에 미국과의 수교 전에는 미국으로 야구선수가 되려고 밀입국하는 청년들이 많아 사회문제가 되었다. 쿠바가 미국과 수교를 맺기 이전에는 합법적으로 미국으로 가기가 힘든지라 미국으로 가려면 여러 위험한 수단을 동원해야했기 때문에 더더욱 주목을 받았다.

쿠바의 야구선수들은 주로 국제대회 참가 시 선수단을 이탈해서 다른 나라 국적을 따는 방식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입했었다.[31] 그러나 이제는 돈 많고 유망주에 관심이 많은 미국 야구단들이 쿠바에 스카우트들을 대거 파견하여 펑펑 돈지랄 중이다. 그리고 2015년 7월 미국-쿠바의 복교로 쿠바 유망주의 메이저리그 러시가 활발해질 것으로 보였는데 정치적인 문제때문에 미뤄졌다고. 이 때문에 기다리고 있다가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생각에 여전히 미국으로 망명 가는 야구선수들이 나왔다가, 2019년부터 쿠바야구협회와 메이저리그가 협약을 맺으면서 쿠바 리그 선수들이 합법적으로 미국에 가서 일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구체적으로 6년 차 이상의 선수가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가 제동을 걸면서 다시 막혔다.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이자 전 구단 영구결번자인 재키 로빈슨[32] 덕분에 1947년 미국 내에 흑인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의 물꼬가 트여 이름을 날린 흑인 선수들도 많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흑인 선수와 유망주들의 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대부분의 흑인 스포츠 유망주들이 '흑인의 강점인 운동능력을 살리기에 더 적합하고', '길고 고달픈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치지 않고 즉시 데뷔할 수 있으며', '장비와 훈련에 돈이 덜 들며 장학금이 더 빵빵해서 경제적 부담이 덜한' 농구미식축구로 많이 빠져나가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야구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히스패닉, 유럽, 동아시아 선수들의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흑인 주전 포수는 씨가 마른지 오래고[33], 여기에 흑인 선발투수 숫자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반대로 적응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외야수 쪽으로는 흑인선수들이 뛰어난 운동력을 바탕을 빠른 적응력을 보이기 때문에 흑인 외야수들이 제법 많은 편이다.[34]

아시아의 야구국가들도 마찬가지고, 네덜란드[35]와 이탈리아라든가 호주 등 중남미가 아닌 국가들에서도 메이저리그로 진출하려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유럽에서 어느 나라도 야구만 해서 제대로 큰 돈 벌 수가 없다. 프로리그도 없는 수준이고 받는 돈이 열악하니 메이저리그를 당연히 노릴 법하다. 호주도 마찬가지라서 메이저리그에서 지원해도 여전히 지금도 호주에서 야구만 하다간 벌어먹기 힘들어 차라리 대만이나 한국이나 일본이라도 노리는 경우도 많다.

한국은 메이저리그에 대해 한동안 아오안이었지만 박찬호 활약으로 인해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이 박찬호 열풍 때 많은 유망주들이 건너가는 유망주 러시도 있었다. 일본 같은 경우 유망주로서 바로 진출하는 경우보다 일단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하며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의 눈도장을 찍어 메이저리그의 러브콜을 받거나 직접 문을 두드리는 쪽 비중이 높다. 다만 일본프로야구에서 실패해서 이렇다 할 커리어도 없는 어린 방출자 출신의 선수가 도피유학성으로 미국에 가는 경우도 없지는 않는데, KBO에서 이런 식으로 간 선수는 대부분 A 이하에서 도태되지만 일본에서 이런 식으로 간 선수는 의외로 AA~AAA 정도는 밟는 경우가 많다. 비록 딱 한 경기지만 메이저리그에서 등판한 무라타 토오루 같은 케이스도 있고.

성공하면 얻는 이득 역시 두드러진다. 메이저리그에 43일만 로스터에 등록되어도 사망할 때까지 연간 $30,000 이상의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며[36], 어떻게든 살아남기만 하면 연금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37] 또한 단 하루만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등록된다면 해당 선수를 포함한 직계 가족들의 헬스케어가 평생 보장이 된다.[38] 미국의 사설 의료보험이 얼마나 비싼지를 감안한다면 삶의 질 자체가 달라질 정도의 혜택을 단 하루만 메이저리거로 뛰고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39] 연봉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는데, 메이저리그는 전 세계 스포츠 리그 중 최고 수준의 연봉을 지불하는 리그이다. 이것도 MLB가 주춤한 사이 유럽 축구, NBA 등 세계화가 더 잘 된 타 리그들에게 따라잡힌 것으로, 예전에는 박찬호의 연봉이 세계적인 축구 스타 몇 명의 연봉을 합친 수준인 적도 있있다. 첫 문장에도 있듯 연방법 최고세율 적용자가 된다. 연방세법 최고세율은 엘리트를 가르는 기준 중 하나로 자주 인용되는 기준이며 메이저리거는 의사, 변호사 등과 더불어 명실상부한 엘리트 전문직 대우를 받는 집단이다. 이것은 관습적인 것이 아니라 연방소득세법 상의 기준이다.

 
 

그에 비해 마이너 리그의 푸대접[40] 역시 유명하기도 하다. 소위 'Winner takes it all'로 설명할 수 있는 미국의 빈부격차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 급여도, 대우도, 그냥 같은 시간 동안 일하는 동네 슈퍼 아르바이트 수준이라 보면 된다. 연방세법 최고세율을 다 뜯기엔 그들은 너무나 가난하다. 다만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일본, 한국, 대만 등 주요 아시아 리그행 러시로 인해서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유출이 가속화되자, 마이너리거도 어느 정도 봉급이 올라서 트리플A급 상위리그에 좀 뛴 선수라면 대충 돈을 벌 정도로 오르기는 했다. 물론 하위 리그는 여전히 얄짤없이 먹고 살기 힘들다.

4. 리그 진행[편집]

리그 진행 방식이 조금씩 바뀌는 경우가 있지만 대략적으로 서술하면 기본적으로 아메리칸리그(AL)과 내셔널리그(NL)로 리그가 나뉘고 각 리그엔 15팀이 소속되어 있다. 이 팀들은 다시 동부지구, 중부지구, 서부지구로 각각 5팀씩 나뉘게 된다. 각 팀은 같은 지구에 속한 팀과 가장 많은 경기를 치른다.[41] 그리고 같은 리그에 속하지만 지구는 다른 10개 팀과 각각 6~7게임을 치르고, 인터 리그를 통해 다른 리그에 속한 팀들과도 조금이지만 경기를 해서 총 162경기를 치른다. 이렇게 정규 시즌이 끝나고 나면 포스트 시즌이 시작된다. 리그별로 각 지구의 1위팀 3팀에 1위팀을 제외하고 승률이 가장 높은 두 팀이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치르고, 여기서 승리한 한 팀을 더해 4개 팀이 디비전 시리즈를 치른다.[42] 여기서 승리한 두 팀이 챔피언쉽 시리즈를 치르고, 여기서 승리한 팀이 각 리그의 우승자가 된다. 마지막으로는 각 리그의 우승자 둘이 겨루게 되는데 이것이 월드 시리즈다.

원래 내셔널 리그나 아메리칸 리그나 그냥 리그에 소속된 팀이 다르다는 것을 제외하면 큰 차이가 없었지만, 1973년 아메리칸 리그가 지명타자제도를 도입하면서 두 리그의 모습이 달라졌다. 이후 2022년 내셔널 리그도 지명타자제를 도입하면서 이제 두 리그의 차이는 없어졌다. 그리고 원래는 양대리그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과 포스트 시즌의 최종 라운드 월드 시리즈를 제외[43]하면 정규 리그에서는 맞붙지 않는다는 원칙 아닌 원칙이 있었다. 그런데 1994년 선수단의 파업으로 야구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자 버드 셀릭 커미셔너가 인터리그 제도를 채택하면서 시즌 중에도 서로 맞붙게 되었다.

그 결과 연고지가 같거나 인접한 팀들의 대결이 지역 팬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면서 어느정도 인기를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다만 지구 별로 팀들의 전력차가 매우 크기 때문에 대진 형평성에 관한 이야기들 역시 꾸준히 논의되고 있다. 또한 같은 디비전에서 자주 만나면서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놓고 경쟁하는 팀들끼리도 일정이 균등하지 않게 배정되는 원인으로도 지목되면서 여러 팀들에게 불만을 사기도 한다. 가령 보스턴 레드삭스는 메이저리그 강팀[44]이자 인기팀인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매년 한 차례씩 인터리그 시리즈를 갖는데, 뉴욕 양키스는 필리스와는 상대도 안되는 전력의 뉴욕 메츠와 6경기를 치른다. 시카고 컵스는 같은 동네 팀인 시카고 화이트삭스[45]와 매년 6경기씩 치르는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캔자스시티 로열스와 만나고[46] 신시내티 레즈클리블랜드 가디언스와 만난다. 이런 불균형 대진에도 불구하고 인터리그 제도를 고수한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47]

결국 1994년부터 2012년까지 내셔널리그 중부지구와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에 배치된 팀 수의 불균형으로 2013시즌부터 한 지구 5개팀으로 각 리그의 팀들이 각자 재편되었다. 내셔널리그 중부지구의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로 옮겨갔다. 이렇게 재편되면서 그간 각 팀마다 다르게 편성되던 팀간 경기수[48]가 아래와 같이 고정되었다. 인터리그 상대 팀을 결정하는 방법은 3년마다 지구별로 순환하여 맞붙는 매치업과 지역 라이벌전 매치업, 이 두 가지가 있으며 이를 모두 합쳐 20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2023년 시즌부터는 양 리그 모든 팀과 1번 이상 상대한다.

2013 시즌~2022 시즌
상대 팀
팀당 경기 수
총 경기 수
비고
동일 리그 동일 지구
19
76
3연전, 4연전 혼합 편성
동일 리그 타 지구
6~7
66
3연전, 4연전 혼합 편성
상대팀마다 홈 경기 숫자가 다름
인터리그
20
모든 팀을 상대하지 않음
단, 지역 라이벌 간 경기는 1년에 4~6경기 편성[50]
2023 시즌부터
상대 팀
팀당 경기 수
총 경기 수
비고
동일 리그 동일 지구
13
52
7 홈경기 - 6 원정경기 혼합 편성
동일 리그 타 지구
6-7
64
32 홈경기 - 32 원정경기
인터리그
4 (지구 라이벌전)
3 (나머지)
46
지구 라이벌전 4경기 (홈 2연전 원정 2연전)
지구 라이벌 외의 인터리그 14개 팀과
각각 3연전 한 번씩 치르는 방식

5. 2024 정규 시즌 순위[편집]

6. 포스트 시즌[편집]

포스트 시즌을 매우 중요시하는 스포츠 리그 중 하나다. MLB는 공식적으로 챔피언십 시리즈의 우승 팀이 페넌트 레이스의 우승 팀이다.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승리한 두 팀이 정규 리그의 공식 우승 팀이며 이 두 팀이 월드 시리즈 우승을 두고 최종적으로 대결하는 시스템이다. 이 두 팀 중에서 승리한 월드 시리즈 우승 팀만이 진정한 우승 팀으로 인정받는다.

포스트 시즌은 원래 초창기 단일리그로만 구성되었던 시절에는 양대리그의 월드 시리즈밖에 없었으나, 1969년에 지구가 2개로 분할되면서 각 지구의 우승팀이 맞붙는 챔피언십 시리즈가 추가되었다. 1994년에 다시 지구가 3개로 분할되면서 각 지구 우승팀과 리그에서 와일드카드팀이 맞붙는 디비전 시리즈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2012년부터는 와일드카드팀이 각 리그마다 한 팀씩 늘어나게 되었고, 이후 2022년부터 포스트 시즌이 확장되어 와일드카드 팀은 3팀으로 늘어났다.[51] 와일드카드 팀간의 대결인 와일드카드 게임은 단판제로 시행되고 있고, 디비전 시리즈는 5전 3선승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는 원래 5전 3선승제였다가 1985년 7전 4선승제로 변경되었으며, 월드시리즈는 원래부터 7전 4선승제였다. 다만 중간중간 9전 5선승제를 시행한 적도 있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포스트 시즌만 거의 2주~3주에 달한다. 그 영향으로 초창기 10월 초반이면 끝나던 포스트 시즌도 거의 10월 말이 돼야 끝나는 상황이다. 이처럼 포스트 시즌 경기수와 참가팀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팬들은 더 긴장감 있고[52] 긴 야구 시즌과 긴박하고 드라마틱한 포스트 시즌을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사무국과 구단과 방송국은 관심도가 집중되는 포스트 시즌 경기를 통해 높은 수익을 올리지만, 한편으로 선수들은 정규 시즌과 포스트 시즌까지 합쳐 더 많은 경기를 뛰게 된 탓에 피로감을 호소하거나 실제로 이듬해 부상 또는 부진을 겪는 경우도 많다.[53]

월드 시리즈 우승이 장기간 동안 없는 팀들의 스케일이 상상을 초월하는데 무려 마지막 우승 이후 1세기가 넘도록 우승이 없다가 2016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뤄낸 시카고 컵스나 3년만 늦었으면 창단 100년동안 단 한번도 우승을 못 했을 뻔한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설명할 필요도 없고, 1948년 이후 75년 동안 우승이 없는 클리블랜드 가디언스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1979년 이후 44년 동안 우승이 없는 피츠버그 파이리츠가 있다. 게다가 시애틀 매리너스의 경우 우승은 고사하고 월드 시리즈에 진출한 경험조차 없다. 게다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밀워키 브루어스는 창단 이후 지금까지 단 한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이 없다.[54]

1980년대 이후, 월드 시리즈 우승이 없는팀들도 상당수인데 한국의 메이저리그 '국민구단'으로 불리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는 2020년에 우승하기 전에는 1988년이 마지막 우승이었고, 뉴욕 메츠는 1986년, '한국인의 웬수'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1983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1984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1989년이 마지막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랜기간 한국시리즈 우승이 없는 롯데 자이언츠가 32년이란 점과 NPB에서 오랜기간 일본시리즈 우승이 없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36년인 점을 감안하면 메이저리그팀들의 스케일이 얼마나 큰지를 잘 알 수 있다. 심지어 다음 우승까지 무려 53년이 걸렸던 주니치 드래곤즈마저도 컵스가 최근에 우승하기까지 걸린 기간과 비교해보면 그저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7. 리그 수준[편집]

당연하겠지만 KBO, NPB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수준이 높다. 모든 야구선수의 꿈의 리그답게 실제로 온 세계에서 가장 야구를 잘하는 선수들이 모이는 리그이며, 메이저리그에서 1시즌이라도 뛰었다는 커리어만 있어도 외국 리그서 영입 후보군에 넣을정도다. 따라서 메이저리그에서 롱런하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다른 리그 선수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압도적인 야구 실력을 자랑한다. 메이저리그보다 수준이 낮은 선수들, 혹은 메이저리그에 가기 위한 육성 과정을 거치는 선수들이 모이는 마이너리그가 보통 다른 리그들과의 수준 비교가 될 정도이며[55] 해당 리그를 평정하는 다른 리그의 탑급 야구 선수들은 대다수가 메이저리그 입성을 목표로 한다.

일단 투수의 경우 구속부터 다른 리그 소속 투수들보다 월등히 빠르다. 2023년을 기준으로 KBO, NPB의 경우 투수 평균 구속이 140km/h대 중반[56] 정도인데 MLB는 150km/h 전후이며, 이마저도 최근에는 더 빨라져 150km/h대 초중반 정도까지 상승했다. 게다가 최고 구속도 KBO는 163km/h[57], NPB는 165km/h인 반면 MLB는 무려 170km/h이다. 거기다 한국에서는 저 정도 공을 던지는 투수가 거의 없고 NPB에서도 오타니에 더해 사사키와 후지나미가 끝인데 메이저에서는 저 정도 구속을 던지는 투수가 꽤 있다. 즉 다른 리그에서 파이어볼러 취급을 받아도 메이저리그로 가는 순간 똥볼러가 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58] 게다가 변화구와 제구력 역시 다른 리그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듯한 수준을 보여준다. 제구 잡힌 155를 100개씩 던지는 투수들도 발에 채이다못해 불펜 소모품으로 쓰일 때도 있으며,[59] 모든 구종을 센티미터 단위로 제구하는 투수들도 쌔고 쌨다.[60][61]

그러나 더욱 무서운 건 이런 괴물같은 투수들을 상대로 완벽에 가까운 선구안을 통해 볼넷을 고르거나, 수십 개씩 홈런을 쳐대는 타자들, 이런 타자들을 상대로 가히 매드무비 급 수비를 보여주는 선수들이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62][63] 그래서 포수와 같이 체력소모 많은 보직 + 수비가 엄청 좋은 타자들이 멘도사 라인 타격이 아니라면 2할 5푼만 쳐도 주전을 보장받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점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강팀들도 모든 전력을 쏟아붓는 포스트 시즌 경기을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포스트 시즌의 경기 수준은 그야말로 축구로 따지면 챔피언스리그, 혹은 월드컵 토너먼트 경기와 견줄 정도로 수준이 굉장히 높다. 특히 그런 강팀의 1~3선발 투수들이 전력을 쏟아붓는 경기들은 그야말로 진검승부라는 말로도 설명이 부족할 정도로, 괴물같은 투수들이 160km/h 이상의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패스트볼과 저세상 무브먼트를 자랑하는 변화구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한 코스로 무자비하게 던져댄다. 그런데 그들을 상대하는 타자들 역시 투수들을 능가하는 집중력과 컨택, 파워로 에이스들을 털어대면 5회도 못 버티고 강판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며, 또 그런 타자들을 틀어 막기 위해 팀의 모든 선발 투수들과 불펜 및 마무리투수들이 총 동원된다. 조금이라도 밋밋하게 들어가는 변화구나 실투 한 구가 승패와 직결되는, 말 그대로 왕중왕전 수준의 야구경기를 보여준다.

한동안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나 올림픽 같은 국제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이 선전하고 미국이나 중남미 팀들이 부진하면서 국내에선 메이저리그를 만만하게 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러나 메이저리그의 선수들은 비시즌 때 치뤄지는 국제 대회에 나가서 괜히 부상을 입으면 추후 계약에 불이익을 받을 것을 더 큰 손해로 여긴다. 구단도 마찬가지로 고액의 연봉을 주는 선수가 활약하지 못하는 것을 훨씬 손해로 여긴다.[64] 그래서 대부분의 에이스나 최고수준의 선수들은 국대 경기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으며, 보통 마이너리거들이나, 평범한 메이저리그 선수들로 꾸려 올림픽, WBC 등의 대회에 참가한다.[65] 실제로 종합적인 실력이나 인프라에서 KBO보다 월등한 NPB조차 메이저리그에 비하는 것은 어불성설으로, 일본에서도 최고 소리 듣던 선수들이 대부분 성적이 하락하거나 먹튀로 전락한 곳이 메이저리그다. 심지어 메이저리그에서 10년 연속 200안타를 기록한 스즈키 이치로도 일본 시절에 비해 기록이 하향되었다.[66]

분석을 해도 알 수 없는 괴물같은 선수들이 끊임없이 데뷔해 활약하다 보니 순수 작전 구사에 있어서는 저평가를 받지만 이들의 플레이를 보면 절대 메이저 리그가 작전 구사 못한다는 소리는 못 한다. 특히 작전 야구로 유명한 내셔널리그를 주로 보는 이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면 실례.[67] 다만 점수차가 크지 않을 때 무사 1루, 무사 1, 2루 상황에서 팀내 최고의 타자가 나오지 않는 이상 거의 대부분 번트가 나오는 NPB, KBO와 달리 메이저리그는 팀내에서 타격이 가장 좋지 않은 타자가 아닌 이상 강공을 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어지간히 타격을 못하는 타자가 아니라면 번트로 아웃카운트 하나를 헌납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냥 타격하는게 더 득점할 확률이 높다고 판단하는 메이저리그 야구계의 성향일 뿐이며 절대 작전야구를 못해서가 아니다. 번트를 대고 점수를 짜내는 빈도가 상대적으로 KBO, NPB에 비해 크게 적을 뿐이다.

해외 야구를 잘 모르는 대부분의 국내 해설자들이 '일본 야구는 섬세한 작전야구로 변화구나 유인구로 약점을 파고들고 미국 야구는 피지컬을 앞세워 강속구로 정면승부한다'라는 식의 해설을 자주 하는 바람에 이런 편견이 들어선 것도 있다. 실제 메이저리그 전문으로 출발한 송재우, 민훈기 해설이나 김형준 기자를 포함한 몇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야구인들 해설이나 칼럼 내용을 보면 메이저리그에 관해서 기초적인 내용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MBC SPORTS+에서 중계권을 따내고 거의 매일매일 메이저리그 경기를 편성해서 중계해주고 류현진, 추신수 등등 선수들이 활약함에 따라 관심도도 상당히 높아져서 세부적인 내용은 모를지라도 위에 글처럼 메이저는 파워가 단순 파워만 강하다, 정면승부한다, 작전 구사를 안 한다 등등 같은 얘기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미 류현진 등판 경기 중계만 해도 평일에 인터넷으로만 실시간으로 50만 명이 볼 정도로 주목도가 높고 자연스럽게 메이저리그 야구를 접하면서 메이저리그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야구 보는 팬이면 다 안다.

실제 한/미/일 야구를 모두 경험한 이상훈은 한국보다 일본이 파워가 있고, 일본보다 메이저리그가 훨씬 정교하다 라고 이야기했다. 역시 한/미/일 야구 모두 경험한 구대성도 미국과 일본 타자들 상대하다가 돌아와서 한국 타자들을 상대하니 쉽게 느껴지더라고 발언했다. 또한 재일교포 출신이라 일본인 코치들을 많이 데려오며 일본식 야구를 추구했던 김성근 감독도 일본 야구가 가장 정교한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단호하게 가장 정교하고 철저하게 약점을 분석하면서 플레이하는 곳은 미국이며, 미국에서 분석하는 것을 보고 일본이 들여온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런 편견은 한국 뿐만이 아니라 일본에도 퍼져 있는 듯하다. ONE OUTS을 그린 카이타니 시노부도 이 편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메이저리그를 정정당당히 승부하는 바보들이라고 알고 있는데 게임을 보면 그 녀석들은 오래전부터 우리보다 훨씬 약았고 이기는 법을 잘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애초에 30개 구단이 단 하나의 정상 자리를 놓고 아웅다웅하는 살벌한 승부의 세계에서 치밀하게 이기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건, 애초에 성적은 장식이고 선수 여럿을 적당히 잘 키워서 돈벌이 수단으로 삼겠다던가 한번에 이익 당기고 끝낸답시고 구단을 해체하겠다는 의미밖에 없다.[68]

 

8. 한국에서의 인식[편집]

미국의 모든 프로 스포츠 리그 중 압도적인 인지도와 인기를 자랑하며, 당연히 야구팬이라면 모르거나 관심을 안 가질 리가 없다.[69]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메이저리그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라면 박찬호의 진출이 시초이다. 메이저리그에 대한 인지도가 낮던 1990년대 초중반까지 메이저리그는 그저 미국의 큰 야구리그 정도 수준이었으며, 한국 방송사에서 중계조차 하지 않으니 관심을 가지기 어려웠다. 따라서 한국인들 가운데 박찬호 이전에 메이저리그를 보던 사람들은 야구에 본래 관심이 있던 사람들 중 이민이나 해외유학 등으로 MLB를 현지에서 접한 경우, AFKN 중계를 보거나 들으면서 견문을 넓힌 경우[70] 등 극히 일부였다.[71]

그러다가, 박찬호의 성공으로 메이저리그에 대한 관심도가 커졌고, 그래서인지 역으로 박찬호가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야구한다며 배신자에 매국노 취급하며 테러를 가했던 사고도 있었다. 정확히는 메이저리그에 너무나도 관심이 가서 한국야구리그가 죽는다고 하던 것. 하지만 낯설고 머나먼 미국 무대인 메이저리그에서 박찬호가 보여준 성장과 활약은 IMF 외환위기 시대의 대중들에게 희망을 심어줬고, 유망주들에게 메이저리그 진출 꿈의 계기가 되었다는 장점이 컸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박찬호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메이저리그 팀들에게 관심을 가지거나 응원하게 되는 한국인들이 생겨났고, 관련 커뮤니티 사이트들도 탄생했다. 하지만 박찬호가 전성기가 지나며 부상과 부진으로 대중의 관심을 잃게 되자 일부 야구빠를 제외한 대중들에게 메이저리그는, 최고의 리그인줄은 알지만 굳이 찾아볼 생각이 없는 리그로 한동안 잊혔다.

그리고 2012년 말 류현진이 KBO에서 최초로 메이저리그 직행이 있었고, 박찬호 이후 풀타임 메이저리거로서 활약하고 있는 추신수에 대한 재조명 등으로 대중에게 다시 한번 메이저리그가 인식되었다. 1990년대 메이저리그 경기를 시청하다 캔자스시티 로열스팬이 되어 20년 넘게 팀을 응원했던 이성우의 사연이 미국 내에서도 화제가 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메이저리그에 대해 아는 바 없던 시절부터, 그것도 거의 듣보잡격인 팀을 응원하고 있었다는 것이 미국 사회에서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 들여진 모양이다. 결국 올 2014년 시즌 팀의 초청으로 캔사스시티로 간 이성우는 그가 다녀간 후 로열스가 8연승으로 아메리칸리그 중부조 1위로 오르면서 팀의 '행운을 부르는 존재'로 다시금 거듭나게 되었다.[72] 여기에 강정호가 2015년 시즌을 피츠버그 파이리츠 소속으로 시작하게 되면서 관심이 더욱 커질 전망이다. KBO 야수 출신으로는 첫 메이저리그 진출이기에 많은 기대를 갖게 한다. 그리고 강정호가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덕분에 나머지 KBO 선수들 역시 메이저리거로 진출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고.[73] 2015년 시즌 후 넥센 히어로즈박병호가 가능성이 높은 선수로 주목받았고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포스팅에 성공하고 계약까지 체결하면서 2016년 메이저리그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였다. 또한 김현수와 이대호까지 함께 진출하며 역대 최다의 코리안리거가 활약중이다.

그러나 결국 메이저리그와 한국 프로야구의 수준 차이를 극복 하지 못하고 2016년 역대 최다 숫자의 코리안리거를 배출하였지만 대부분 빅리그에 안착하는 데에는 실패하여 대부분이 KBO리그로 리턴하여 현시점에서는 마이너 진출인 최지만과 일본 직행인 오승환을 제외하면 류현진, 강정호 정도만이 한국 프로야구 직행 선수의 성공 사례로 남게 되었다.

 

2020년에는 김광현이 바뀐 포스팅 제도의 첫 번째 수혜자로 빅리그에 진출하여 준수한 성적을 거둬 2021년까지 활약했다. 또한 2021년에는 김하성이 오랜만에 야수로서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여 KBO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의 정상급 수비를 선보였다. 양현종 역시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메이저리그 무대 등판을 해봤으나 그저 등판에만 그쳤다.

한편 이에 따라서 국내 선수가 진출해있는 팀을 응원하는 경우가 많아져 자연스럽게 다른 팀의 선수 내지 감독 간에 마찰이 생기면 다소 분위기가 나빠져 그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은 매국노로 몰리기도 한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대한민국의 구단별 인기 참조.

이와는 별개로, KBO 리그에서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오랫동안 암흑기에 빠지면 다른 팀으로 환승하는 일을 치욕적으로 느끼는 팬들이 차라리 수준이 더 높은 리그인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갈아탄다는 웃지 못할 농담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수준은 KBO 리그에서 우승팀조차 동네야구로 만들어버리는 수준이기 때문에 일단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입문한 하위권 팀 팬들은 이후로 자신의 원래 팀 경기는 물론 아예 KBO 리그 자체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그러나 KBO 리그의 전체적인 수준이 평준화되며 이러한 현상이 줄어들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메이저 리그에서 망한 선수들 이야기가 나오면 십중팔구 KBO 오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실제로 KBO에 오는 선수들도 있다 보니까[74] 꽤나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발언.

한국과 미국은 시차가 매우 커서 국내에서 메이저리그 경기는 새벽이나 아침에 생중계로 볼 수 있다.[75]

8.1. 구단별 인기[편집]

17.1. 야구 모자[편집]

9.1. 커미셔너[편집]

Commissioner of Baseball

현재의 메이저리그가 정립된 1903년에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내셔널 위원회(National Commission)'라는 조직이 있었다. 당시 양대리그 총재와 위원회 의장(Commission Chairman) 총 3인이 내셔널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런데 위원회 의장은 양대리그의 중재자 역할이었기 때문에 각 리그의 총재에 비해서 힘이 적었다. 하지만 1919년 블랙삭스 스캔들이 발생하자 양대리그 총재들보다 상위에서 리그 전체를 총괄할 권위자가 필요하다는 점을 공감했고, 결국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할하는 커미셔너가 등장했다.

커미셔너는 MLB 사무국의 수장으로서 메이저리그 전체의 발전을 위해 일한다. 그런데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메이저리그 사무국 최정점에 있는 커미셔너는 늘 구단주들과 서로 견제하는 위치에 있다. 한편, 시대별로 메이저리그가 놓인 상황에 따라 커미셔너들의 성향이 조금씩 달라진다.

초대 커미셔너인 케네소 랜디스는 블랙삭스 스캔들이라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의 흑역사를 해결하고, 구단주들이 가진 입김을 억제하기 위해 강직하게 리그를 이끌었지만 악명높은 인종차별의 어두운 그늘이 자리잡고 있다. 해피 챈들러나 포드 프릭은 메이저리그의 확대를 위해 힘써 진보적인 커미셔너로 손꼽힌다. 피터 위버로스와 버드 셀릭은 메이저리그의 가치를 상업적으로 확대하는 데 성공한 커미셔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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