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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송고등학교 야구부 No.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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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朴鍾皓 | Park Jong-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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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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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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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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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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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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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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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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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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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트윈스 (1992~1998)
현대 유니콘스 (1998~2003)
삼성 라이온즈 (2004~2008)
LG 트윈스 (2009~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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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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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 피닉스 야구단 수비코치 (2019)
롯데 자이언츠 2군 수비코치 (2021)[7]
백송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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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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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시절: Baltimora - Tarzan Boy[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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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구암초, 성남중, 성남고를 졸업하고 고졸연고 자유계약으로 1992년 LG 트윈스에 입단하였다. 입단 때만해도 유격수였으나 당시 감독 이광환이 박종호의 어깨가 약하다 판단하고 2루수로 전향시켰다. 그 해 시즌 종료 후 김용달 타격코치 주도로 스위치 히터 전환을 시도하였고, 1993년에 좌우타석 홈런을 치는 등 주전 2루수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원래 스위치 히터를 안 하려고 마음먹었으나 김용달 타격코치와 약간 자존심이 상할 마음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너를 마음껏 밀어줄 테니 한 번 바꿔서 하자. 실패하면 모든 욕은 내가 먹겠다. 너는 따라와라."라고... 하면서 스위치 히터로 전환하게 된 일화가 있다.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 중 한 명으로, 그 해 2할 6푼 타율에 21도루, 56타점으로 하위타선의 해결사 역할을 하며 같은 팀 유지현과 준수한 키스톤 콤비를 이루면서 2루수 골든 글러브 수상. 근데 생각해보면 굉장히 운이 좋은 시즌이었다. 단순히 성적만 보기에는 그다지 뛰어난 성적은 아니었기도 하고, 비슷한 시대에 박정태, 강기웅, 이명수 등[12] 타격이 뛰어난 2루수가 많아서 박종호가 골든글러브를 받을 것을 예상하기는 힘들었다. 근데 마침 94년도에 이 선수들이 부상으로 풀타임을 못 뛰거나 부진하여 박종호가 받은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완전한 주전 2루수로 안착하나 했는데, 1995년에는 롯데 자이언츠 포수 강성우와의 충돌로 인한 손목 부상과 방위병 복무로 인해 1군 61경기 출장에 그쳤고, 설상가상으로 1996년에는 방위병의 경기 출장이 전면 금지되면서[13] 잔여 기간 동안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했다. 1997년까지 2년 연속으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고, 이는 곧 밑에 서술되어 있듯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된 계기가 되고 만다. 거기다 그 당시 LG 내야진은 신국환, 안상준, 권용관 등 센터 내야 자원이 많았기 때문에 방위 복무와 부상으로 고전했던 박종호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14]
1998년 좌완투수 최창호를 상대로 트레이드되어 한 시즌 1위팀 한국시리즈에 데뷔하기 위한 현대 유니콘스로 이적하게 된다. 이는 LG 트윈스의 트레이드 흑역사 가운데 하나로 뽑힌다. 박종호는 현대 이적 이후 주전 2루수 자리를 꿰차고[15] 이후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를 3개나 더 챙기며 현대 왕조의 핵심 멤버가 됐지만 30대 중반에 접어든 최창호는 LG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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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니콘스로 이적한 후에는 유격수 박진만과 호흡을 맞춰 류중일 - 강기웅 키스톤 콤비 이래 박진만 - 박종호라는 최강의 키스톤 콤비가 탄생되었다.[16] 이후 현대에서 3번이나 우승을 맛보게 된다.[17]
이후 현대에 있던 키스톤 콤비는 삼성에서도 이어지나 이후에는 그의 노쇠화와 잔부상이 찾아오면서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기존의 박진만의 파트너였던 박종호의 자리에는 김재걸이 땜빵으로 메워 주다가 2007년부터 신명철이 대신하게 되었다.
트레이드 직후인 1999년 3루수와 2루수를 오가며 3할 타율에 10홈런 13도루를 기록, 이듬해의 대활약을 암시하는 성적을 기록하였다. 이 해의 10홈런은 2000년과 더불어 둘 뿐인 박종호의 두 자리수 홈런. 이 해에 골든글러브를 탔으면 홍현우도 하지 못한 2루와 3루에서 모두 골글을 탄 유일무이한 선수가 될 수 있었으나 경쟁자들이 .321의 타율에 22홈런을 때려낸 김동주와 .303에 24도루를 기록, 한화의 우승을 이끈 강석천 등으로 쟁쟁했고, 결국 .340의 타율을 기록하며 커리어하이를 찍은 김한수가 타갔다. 여담으로 이 해 박종호가 맞은 사구는 무려 31개로, 종전 기록이던 공필성의 기록을 경신했다. [18]
현대 시절에는 김재박 감독이 좋아했던 작전형 2번타자로 1번 리드오프 전준호의 뒤를 받쳐주는 역할을 했다. 전준호가 안타치고 도루하면 박종호가 번트를 대거나 진루타를 만들어주는 식. 그만큼 잘 쳤고 본인의 작전수행능력도 뛰어났다.[19]
2000년 소속 팀이 역대 최강팀으로 불리울 때는 미묘하게도 성이 같은 박경완, 박재홍, 박진만과 같이 역사상 최강의 골글 센터라인[20]을 구성하였고, 특히 121경기 .340의 타율로 타격왕[21]에 올랐으며[22] 59경기 연속 출루 기록도 세웠다.[23] 한 가지 흠이라면 코시에서의 실책.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9회 초 병살성 타구를 최고 수준의 수비를 보여주던 박종호가 실책을 2개 연속으로 저지른 것이다. 이로 인해 현대는 3연승 내리 달린 후 3연패를 하면서 사지에 몰리지만 7차전의 톰 퀸란의 활약으로 역대 최강 팀의 이름에 걸맞게 한국시리즈까지 제패했으니 박종호에게 다행이라면 다행. 참고로 7차전에서 박종호는 지명타자로 출전했고, 현대의 창단 첫 우승이자 핵심 멤버였던 노장 이명수가 2루를 맡았다.
그리고 그해 시드니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같이 출전한 유니콘스 소속 투수들이 부진한 가운데 박재홍과 함께 맹활약했다. 허나 2001년 전 해의 활약이 무색하게 .241로 규정 타석 꼴찌행.[24] 무려 1할이나 떨어졌다. 물론 전 해 멤버들이 거의 예외없이 00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진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우승만을 보고 달린 작년의 후유증으로 볼 수도 있었으나, 어찌됐건 팀의 정규 시즌 2위 달성에 힘을 보탰다. 2002년과 2003년에는 [25] 조금씩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팀의 3번째 우승을 이끌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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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 자격을 얻어 2003년 11월 말 삼성 라이온즈와 4년 22억원에 계약을 맺어 이적하게 된다. 박종호는 애초 현대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현대에 남을 생각이었지만 현대 구단의 재정난과 같은 팀 선배 이숭용과의 대우 문제로 인해 결별하게 된다. 당시 현대 구단은 모기업이던 현대전자의 자금난 이후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던지라 FA 선수 계약에도 힘에 부치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이숭용과 박종호가 FA로 풀렸는데 현대 구단은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주장이었던 이숭용을 내부 FA 협상의 우선순위 대상자로 낙점하고[27] 상호 면담 후 계약을 했다. 이숭용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자 현대 구단의 자금 사정에는 박종호의 제안까지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고 더구나 박종호의 기량에 노쇠화가 올 것이라 판단하여 박종호의 조건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현대와의 인연은 끝났다.
박종호에게는 삼성 외에 타 구단의 오퍼가 없었고 결국 삼성으로 가게 되는데 여기에도 사연이 있다. 삼성은 당초 두산 베어스에서 FA로 풀린 정수근을 영입하려고 했으나[28] 정수근이 롯데로 이적하자 남는 예산으로 박종호와 계약을 하게 된다.[29] 박종호는 개인적으로 삼성 이적을 매우 반겼는데 어린 시절 삼성 라이온즈 어린이 회원이었다고 한다. 현대에서는 박종호의 보상 선수로 노병오를 지명했으나 정작 노병오는 부상의 여파로 인해 2군에서도 불만 지르다가 은퇴하게 된다. 여담으로 박종호와 노병오는 2020년 롯데에서 코치 신분으로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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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경기 연속 안타를 달성한 박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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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경기 연속 안타 한국 신기록을 달성한 박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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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경기 연속안타 기록을 세운 박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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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 23 박종호, '39G 연속안타' 亞 신기록의 전설
삼성 이적 첫 해인 2004년에는 2003년 후반기부터 이어온 연속 안타 기록을[30] 그대로 이어가는 등 꾸준히 활약을 하였으며, 39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31] 이 때는 삼성이 박종호의 연속 안타 이벤트를 열었을 정도.[32][33] 이 39경기 연속 안타 기록은 10년 후인 2014년에 KBO가 비 더 레전드라는 일종의 게임으로 쓰이게 된다. 2004년에도 작년과 비슷한 성적을 찍었다. 수비에서는 괜찮았고 골든글러브도 4년만에 탈환하였다.
그러나 두산과의 2004년 플레이오프에서 큰 부상을 당한 것을 기점으로 이후 2005년부터 잦은 부상에 시달리면서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2007년 1할대의 타율에 그치고 시즌 초부터 부상으로 이탈한 뒤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거기에 당시 선동열의 야구 스타일인 기동력 야구에 맞지 않았던 그는 강영식[34]과 트레이드 된 신명철이 영입되면서 출전 비중이 줄어들었고, 2008 시즌 도중 한화에서 건너온 용병 제이콥 크루즈와 함께 웨이버 공시되어 사실상 은퇴에 몰렸지만, 2008 시즌 후 친정 팀 LG 트윈스 감독으로 있던 옛 스승 김재박[35]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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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를 선언하자마자 2군 야수 인스트럭터로 LG 구단에서 임명하여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2군 수비코치를 맡고 있다가 2015년 6월 15일 서용빈과 함께 1군으로 올라왔다.
2016년 들어서는 과감한 수비 시프트를 선보이고 있다. 결과는 나름대로 성공하는 편. 다만, 시간이 갈수록 이 수비 시프트로 인해 평범한 땅볼타구가 외야로 빠져나가고, 평범한 플라이나 단타성 타구가 장타로 둔갑되어 실점이 크게 올라간다는 단점도 있다.
하지만 2018년에 들어선 기본적인 수비에서조차 잔실수가 많아지고 또 실책수가 증가함에 따라 슬슬 까이고 있다. 결국 시즌 종료 후인 2018년 10월 19일 새 단장으로 차명석 해설이 임명됨과 동시에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2019년 한 해 동안 상무 피닉스 야구단의 수비코치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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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28일 롯데 자이언츠에 새로 부임한 허문회 감독을 보좌할 롯데의 수석코치를 맡게 되었다.[37] # 동시에 1군 수비코치도 겸직한다.
팬들의 평가는 나름 괜찮은 편. 당겨치는 타자들에 대해서는 3루수 한동희가 1-2루간에 위치하는 극단적인 시프트를 사용하며 재미를 보는 경우가 많은 등 시프트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편이라는 평을 듣는다. 감독이 각종 발언들로 어그로를 끌던 것과 달리 박종호 수석코치는 별 탈이 없었다는 후문.
2021 시즌이 끝나자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고 2021년 11월 1일 백송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이 나왔다.
역대 성적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92
|
45
|
73
|
.192
|
14
|
0
|
1
|
1
|
7
|
10
|
0
|
8
|
.260
|
.272
|
|
1993
|
91
|
316
|
.263
|
83
|
15
|
4
|
6
|
33
|
42
|
8
|
33
|
.392
|
.331
|
|
1994
|
105
|
335
|
.260
|
87
|
14
|
6
(1위)
|
6
|
56
|
59
|
21
|
58
|
.391
|
.366
|
|
1995
|
61
|
207
|
.251
|
52
|
5
|
3
|
0
|
22
|
26
|
12
|
28
|
.304
|
.331
|
|
1996
|
군복무(공익근무요원)
|
|||||||||||||
1997
|
65
|
160
|
.219
|
35
|
4
|
2
|
0
|
11
|
16
|
2
|
29
|
.269
|
.337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98
|
103
|
218
|
.229
|
50
|
8
|
2
|
2
|
18
|
38
|
8
|
45
|
.312
|
.358
|
|
1999
|
119
|
396
|
.301
|
119
|
29
|
4
|
10
|
55
|
79
|
13
|
59
|
.470
|
.388
|
|
2000
|
121
|
441
|
.340
(1위)
|
150
|
30
|
3
|
10
|
48
|
89
|
9
|
73
|
.490
|
.428
(2위)
|
|
2001
|
123
|
456
|
.241
|
110
|
12
|
3
|
9
|
65
|
67
|
5
|
64
|
.340
|
.331
|
|
2002
|
108
|
402
|
.266
|
107
|
15
|
2
|
7
|
53
|
58
|
4
|
36
|
.366
|
.326
|
|
2003
|
131
|
502
|
.293
|
147
|
26
|
4
|
6
|
61
|
90
|
6
|
65
|
.396
|
.371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2004
|
132
|
514
|
.282
|
145
|
25
|
0
|
8
|
59
|
78
|
7
|
56
|
.377
|
.350
|
|
2005
|
119
|
392
|
.268
|
105
|
21
|
0
|
4
|
36
|
63
|
5
|
64
|
.352
|
.368
|
|
2006
|
104
|
273
|
.238
|
65
|
13
|
0
|
1
|
30
|
22
|
3
|
37
|
.297
|
.325
|
|
2007
|
17
|
27
|
.185
|
5
|
3
|
0
|
0
|
4
|
0
|
0
|
1
|
.296
|
.214
|
|
2008
|
33
|
82
|
.232
|
19
|
2
|
0
|
0
|
5
|
8
|
0
|
9
|
.256
|
.304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2009
|
62
|
161
|
.267
|
43
|
5
|
1
|
1
|
11
|
16
|
0
|
23
|
.329
|
.357
|
|
2010
|
1군 미출장
|
|||||||||||||
KBO 통산
(17시즌)
|
1539
|
4955
|
.270
|
1336
|
227
|
35
|
71
|
584
|
761
|
103
|
686
|
.373
|
.356
|
- 우투양타의 스위치 히터로 2000년 시즌 타율 0.340으로 타격왕에 올랐었는데, 이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한 스위치 히터 타격왕이었다.[38] 그리고 타격왕이 나온 팀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 못 한다는 징크스를 최초로 깬 타격왕이다.
- KBO 리그에서 유일하게 타격왕을 수상한 다음해에 정규타석 타율 꼴지를 차지한 선수이기도 하다.[39]
- 이외에도 59경기 연속 출루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2017년 김태균이 깨 버렸다. 이 정도면 최태원과 더불어 연속 기록의 달인.
- 외모와 달리 싸움 실력이 대단한 선수였다고 한다. 선수들이 꼽은 싸움짱 1위로 꼽히기도 했다. 1997년 LG와 롯데의 사직 경기에서 주루 플레이 도중 당시 롯데 주전 2루수 박정태와 시비가 붙어 양팀의 벤치클리어링으로 번진 적이 있었다. 박정태도 작은 체구와 달리 싸움에서 2인자라면 서러운 선수라 둘이 제대로 붙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이야기가 많았다.[40]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송유석이 술회하기를 불펜에서 경기를 보고 있다가 박정태와 박종호가 붙는 장면을 보고 튀어나가 박정태에게 죽빵을 날려 징계를 받았다고 한다. 하필 그 장면이 사직 야구장 전광판에 나가는 바람에 LG 트윈스가 묵고 있는 숙소로 롯데 팬들의 항의전화가 엄청 많이 왔다고 덧붙였다.
- 서울특별시 출신으로 서울에서 초, 중, 고교를 나와서 서울 연고팀 LG 트윈스에 입단한 서울 토박이지만 원년부터 자신이 응원했던 팀은 삼성 라이온즈였다고 한다. 삼성에서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의 기사를 보면 "프로 원년 때 삼성 어린이 회원으로서 삼성을 열렬히 응원했다"는 인터뷰 내용도 등장한다.
-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한 후 대구광역시 달서구 본리동의 한 아파트 상가에 빵집을 열었으나# 지금은 문을 닫았다. 다만 가족은 은퇴 전까지 대구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박종호의 아들이 대구에 있는 리틀야구단에 뛰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지만 야구를 접은것으로 보인다.
- 선수시절 구레나룻과 수염을 기른 선수로 유명했는데, 실제로도 온 몸에 체모가 많은 체질이였다.흑백 사진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를 6개나 가지고 있는 반지 캡터의 이미지와 다르게 큰 경기에 약한 이미지가 있다.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된 지 얼마 안 되어 친정팀 LG 트윈스와 맞붙은 1998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는 8회 초 1사 만루에서 병살타를 쳐 찬스를 날렸고, 2000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는 9회 초 2연속 실책을 저질러 시리즈를 7차전까지 끌고가고 말았다.[41] 이외에도 2001년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도 평범한 플라이볼을 놓쳐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고, 2003년 한국시리즈에서도 1차전, 3차전에서 각각 실책을 저지르는 등 큰 경기에 약한 이미지가 있다. 그래도 소속됐던 팀 LG 트윈스, 현대 유니콘스, 삼성 라이온즈 모두에서 한 번 이상씩 우승반지를 전부 득템하는 기염을 토했다.[42]
- 이외에도 자신이 몸담았던 LG 트윈스(1994), 현대 유니콘스(2000), 삼성 라이온즈(2004) 소속으로 각각 골든글러브를 수상해봤다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 MBN 야구예능 빽 투 더 그라운드 1기 공개 입단 테스트에 등장했다. 이날 등장한 지원자 중 최연장자로 녹슬지 않은 수비와 타격능력을 보여줬다. 당시 출연 동기가 몸이 아프셨던 어머니께 선수로서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서였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3월 중에 돌아가셨다고.
- 동명이인 선수가 2명이나 있었다. OB에서 뛰던 1964년생 박종호와 삼성에서 뛰던 1975년생 박종호가 있었는데 둘 다 1시즌만에 방출 당한 전력이 있다. 거기다가 각각 포지션이 다르다.
- 야구 관련 인물(KBO)
- 현대 유니콘스/선수단
- LG 트윈스/선수단
- 삼성 라이온즈/선수단
- LG 트윈스
- LG 트윈스/2011년
- LG 트윈스/2012년
- LG 트윈스/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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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대 유니콘스 이적 초기에는 이명수가 주전 2루수였기 때문에 3루수로 나섰다.
[3] 신인 시절에도 유격수로 몇 경기 출장했고 실제로 LG도 유지현이 입단하기 전까지는 유격수로 키우려고 시도했다. 현대로 트레이드된 초기에도 박진만이 프로 2~4년차때 타격의 부진을 겪어서 자주 대타로 갈렸는데 그땐 박종호의 포지션을 유격수로 옮겼다.
[4] ~6월 14일
[5] 6월 15일~
[6] ~5월 10일
[7] 5월 11일~
[8]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박종호~ *4
[9] LG의 박종호, LG의 박종호 안타한방 날려줘요 LG의 박종호, 랄라랄라 랄라 랄라랄라랄라 안타한방 날려줘요 LG의 박종호
[10] 이 응원가는 박종호의 은퇴후 김태완이 물려받는다. 김태완의 삼성 이적후 아직까지 주인은 없다.
[11] 외국인 선수로는 펠릭스 호세와 멜 로하스 주니어가 있다. 이 중 로하스는 정규리그 MVP도 수상하였다.
[12] 각각 '92, '93, '95 골든글러브 수상자이기도 하다.
[13] 1995년까지만 해도 방위병은 홈 경기에 한해 출장이 가능했다. 실제로 90년대 프로야구 대표 스타였던 양준혁, 이종범, 김기태도 이렇게 경기에 출장한 바 있다.
[14] 그러나 셋 다 기대치만큼 못 터져서 결국 시즌이 끝날 때쯤 주전 2루수는 이종열이었다. 이후 2003년 박경수를 거액을 들여 데려오는 등 온갖 노력을 다 했지만 박경수도 미완의 유망주로 남아버렸고, 결과적으로는 손주인이 오기 전까지 LG의 2루는 15년 넘게 구멍이나 다름없었다. 중간에 유지현을 2루수로 보냈지만 이건 부상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이뤄진 포지션 변동이었다. 박종호가 떠나기 전에 해태에서 1억 5천만원 주고 영입한 안상준은 99년 반짝 활약하고 거품이 빠져 두산으로 트레이드되었으며 신국환도 97년에 잠깐 반짝했을 뿐, 주전은 커녕 백업을 전전하다가 한화로 트레이드 되었다. 그나마 권용관이 꾸준하게 선수 생활을 하였으나 주 포지션이 유격수이기도 하였고, 어디까지나 수비형 내야수라 공격에서는 멘도사 라인 근처에서 노는 수준이었다.
[15] 박종호가 오기 전까지 삼청태현의 2루수 자리는 매우 오랫동안 구멍에 가까웠다. 삼미 시절에는 3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받았던 정구선이 있었지만 이후에는 이렇다 할 2루수가 나타나지 않았다. 오죽하면 태평양으로 넘어와서까지 이 문제가 아킬레스 건으로 지적됐을 정도였는데 이 때 이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영입했던 선수가 염경엽, 이근엽 등이었는데 공격력에서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고 말았다. 박종호 이전에는 이명수도 데려왔지만 30대 중반으로, 나이가 많기는 매한가지였고 결국 태평양에서 에이스 노릇까지 했지만 전성기가 지난 최창호를 내주고 박종호를 데려와서야 오랜 구멍을 메우게 된다.
[16] 원래는 기존의 2루수 이명수가 따로 있어 박종호는 2루와 3루를 번갈아 보다가 후에 철벽수비와 한방을 자랑하던 톰 퀸란이 오고 김경기가 SK로 이적, 이명수가 1루로 가면서 2루수로 완전히 안착했다.
[17] 1994년 LG 시절과 2005년, 2006년 삼성에서의 우승을 포함한다면 총 6회의 우승을 경험했다. 같은 팀에서 뛰었던 키스톤 콤비 박진만과 타이 기록. 단 박진만은 SK에서는 우승을 못했지만 박종호는 가는 팀마다 우승을 했다는 점에서 더 무섭다. 박종호 말에 따르면 별개로 우승 보너스는 적었다고 한다.
[18] 우연의 일치로 당시 박종호는 등번호 31번을 달고 있었다.
[19] 그래서 타격왕 출신임에도 통산 번트가 215개로 상당히 많아 전체 3위에 위치해있다. 2위는 같은 팀에 있던 전준호로 216개. 사실 전준호는 통산 2000경기 넘게 선수생활을 하면서 216개의 번트를 댄거고, 박종호는 그보다 못 미치는 1500경기를 뛰면서 번트를 댄거니 실질적으로는 박종호가 번트를 더 많이 댔다고 볼 수 있다.
[20] 또는 밀레니엄 4박이라고 불렀다.
[21] 역대 최초 스위치 히터 타격왕. 그리고 타격왕에 오르는 타자는 그 해 우승을 못한다는 징크스를 완벽하게 깼다.
[22] 여담으로 이당시 최다안타 타이틀홀더도 같은 스위치히터인 장원진 선수가 따내었다.
[23] 이 기록은 이듬해 펠릭스 호세가 63경기 연속 출루 기록을 세우며 경신했다.
[24] 직전 년도 타격왕이 당해 타격 꼴찌를 한 기록은 당연히 지금까지 유일하다. 큰 부상 없이 이러기도 힘들다...
[25] 2002년 0.266, 2003년 0.293
[26] 현대의 자율 훈련에 본인도 너무 만족한 나머지 훈련을 제때 하지않고 노는 것에 정신없었다고... 박동희 칼럼 참고
[27] 게다가 이숭용을 빼면 마땅한 주전 1루수 감이 없었다. 당시 전근표는 2할 5푼 치는 수준이었고 강병식은 수비가 별로인데다가 한 술 더 떠서 1할대를 치고 있었다. 반면 2루수는 박종호가 실력이 가장 우위에 있어 주전이었지만 타격이 별로였어도 채종국, 서한규, 김일경, 김민우등 대체자원이 많았다.
[28] 당시 삼성에는 젊은 리드오프 박한이가 있었으나 박한이와 함께 외야의 한 축을 맡아줄 선수가 필요했는데 정수근이 그 대안으로 선택됐다.
[29] 당시 준수한 2루수로 재일 한국인 출신 고지행이 있었으나 사생활에 문제가 있어 박종호가 계약하게 되었다.
[30] 2003년 8월 29일 수원 두산전~2004년 4월 21일 수원 현대전.
[31] 종전 국내 기록은 1999년 박정태의 31경기 연속 안타, 아시아 기록은 1979년 히로시마의 다카하시 요시히코의 33경기 연속 안타. 다만 박종호의 기록은 2년 연속으로 이어진 것이기 때문에 아시아 신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한 시즌 연속안타 신기록은 여전히 박정태가 가지고 있다.
[32] 하지만 나중에 밝혀진 결과,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걸리고 링거 주사를 맞고 진통제를 먹으면서 경기에 출장했다고 한다.
[33] 2004년 4월 18일 대구 홈경기에서 두산 선발 게리 레스에게 1~3번째 타석에서 범타로 막히며 37연속경기 안타기록 달성 실패 위기에 몰렸고 4번째 타석에서도 평범한 플라이볼을 날렸으나 좌익수가 잡지 않아 안타로 기록되면서 기록행진을 이어 나갔다. 마운드에 있던 레스가 화를 냈던 건 덤.
[34] 당시 강영식도 선동열과 맞지 않던 선수였다.
[36] 6월 2일과 3일, 잠실에서 한화에 연이틀 11:10으로 질 때 박종호의 좁은 수비 범위가 실점의 빌미로 작용했고 이 때문에 2군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이미 35세의 나이로 2루수를 볼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던 상황이었다.
[37] 박종호와 허문회는 1994년부터 1998년까지 LG 트윈스에서 같이 한솥밥을 먹었던 바 있다. 정황상 이 때의 인연으로 영입된 듯.
[38] 다만 당시 현대 감독이던 김재박의 밀어주기도 있었다. 12경기에 일부로 출전시키지 않은 데다가 SK의 틸슨 브리또와 막판까지 타격왕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시즌 막판 SK와의 더블헤더에서 박종호를 고의적으로 출장시키지 않은 것도 모자라 브리또에게 빈볼을 지시하기까지 했다. 이에 화가 난 브리또는 "더러워서 타격왕 안해먹고 만다"라고 한 뒤# 마지막 1경기를 출장하지 않고 출국해 버렸다. 그리고 김재박은 9년 뒤인 2009년에도 또 한 번 이 짓을 했다.
[39] 2000년 .340 2001년 .241
[40] 그 싸움 잘하기로 악명높은 강병규조차도 만만히 보지 않았다고 했다. 참고로 박종호가 야구를 하게 된 계기도 강병규랑 상당히 친해서라고. 강병규가 야구를 하는 것을 보고 하게 된 것이다. 헌데 과거 박종호의 인터뷰를 보면 강병규에게 엄청 맞아가면서 배웠다는 언급을 한적도 있다.
[41] 결국 7차전에서 박종호는 지명타자로 출장했고, 베테랑 이명수가 2루수를 봤다.
[42] 세 팀 이상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해 본 선수는 박종호와 심정수(OB, 현대, 삼성), 최훈재(LG, 해태, 두산), 허도환(SK, kt, LG) 네 명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