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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진영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임선동

by 아기 자동차 2024.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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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동
林仙東 | Lim Sun-Dong
출생
국적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대한민국
학력
연세대학교 교육과학대학 (사회체육학 / 학사)
포지션
투타
프로 입단
소속팀
LG 트윈스 (1997~1998)
지도자
연세대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2014~2019)

1. 개요[편집]

LG 트윈스, 현대 유니콘스 소속 야구 선수, 現 부천 진영고등학교 감독.

고교 시절부터 조성민, 손경수와 함께 트로이카로 묶였고, 대학 시절에도 박찬호, 조성민과 함께 묶일 정도로 대단한 기대를 받던 투수였다.[2] 실제로 프로 데뷔 시즌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었고, 이후 2000년 투수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했다. 그렇기에 한국프로야구계에서 풍운아로 일컬어지는 선수들 중 한 명이자 짧고 굵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선수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연세대학교 야구부 투수코치로 활동[3]하게 되었다가, 2020년부터는 진영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2. 선수 경력[편집]

2.1. 고교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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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폼.[4]

휘문고(84회)[5] 시절 신일고 조성민, 경기고 손경수와 함께 서울 의 초고교급 투수였고 대학 시절에는 3의 선두주자였다. 박찬호, 정민철,[6] 박재홍(광주일고-연세대), 송지만(동산고-인하대), 김종국(광주일고-고려대), 홍원기(공주고-고려대), 손혁(공주고-고려대), 강영수(마산고-연세대) 등과 함께 소위 황금의 92학번이라 일컬어지는 세대 중 한 명.

당대 최고의 유망주였던만큼 잠실 라이벌 OB 베어스LG 트윈스 양 팀 모두가 임선동을 노리고 있었는데, 1991년말 신인 지명 때 OB와 LG 중 주사위 던지기에서 이긴 LG가 결국 임선동을 1차 지명으로 뽑았다. 여담으로 이 때 조성민은 "나는 고려대학교를 갈 거니까 LG나 OB는 괜히 나를 지명해서 1차 지명권 날리지 마라"고 공식 선언한 상태였고, 결국 당장 투수가 급했던 OB는 손경수를 지명한다. 허나 당시 2억 원의 계약금을 제시했던 OB의 기대와 달리 손경수는 장학금을 제시한 홍익대학교에 입학해 버리고, 거기서도 가정사와 사생활 문제로 1993년 말 자퇴한 후 1995년 OB에 입단했다. 하지만 손경수는 간염 악화로 1군에 오르지 못한 채 입단 첫 해 시즌이 끝나고 임의탈퇴된 후 잊혀지고 만다.[7]

한편 임선동은 휘문고를 졸업하고 LG에 1차지명을 받았지만 프로팀 입단 대신 연세대학교 사회체육학과(1992학번)에 진학했다.[8]

2.2. 대학 시절[편집]

대학 3학년 때까지 1년선배 문동환과 원투펀치를 형성했고,[9] 또한 대학 4년 내내 국가대표로도 맹활약했다.

대학 입학 후 치른 춘계리그와 대통령배에서 연달아 우승에 실패했다. 그렇지만 6월 백호기에서 준결승전과 결승전을 이틀 연속 완투하며, 입학 후 팀의 첫 우승을 이끈다.

한편, 입학하고 나서 3학년 때까지는 연고전에서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3연패했다. 이후 대학 졸업반이던 1995년 9월 연고전에서 고 조성민과 맞대결했고, 그 경기에서 승리투수(완투승)가 되기도 한다.영상.

 

대학시절 관련 2020년 임선동 인터뷰.기사.

2.3. 스카웃 파동[편집]

졸업반 시절 일본프로야구 다이에 호크스한국실업야구현대 피닉스, 지명권을 주장한 LG 트윈스 사이에 3중 계약 파문을 일으키며 마찰을 빚었다. 일본 다이에 호크스가 임선동에게 입단제의를 한 것은, 결정적으로 1995년 8월 일본 후쿠오카 유니버시아드 일본전 1실점 완투승, 동년 9월 일본 구라시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 호투[10] 등으로 일본야구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임선동의 회상에 의하면, 후쿠오카 유니버시아드 일본전 완투승 직후,기사1.기사2. 바로 다이에 호크스한테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2020년 인터뷰.2022년 인터뷰.

이러한 임선동의 행위는 한국 프로야구의 질서를 심각하게 저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LG는 KBO를 통하여 일본프로야구조직(JBO)[11] 측에 임선동의 입단을 용인하지 않도록 압박하였다. 1995년 11월 2일에는 JBO 커미셔너가 공식적으로 진출 불가를 선언하였다.[12] 현대 피닉스 또한 현대그룹태평양 돌핀스를 인수(1995년 8월)해서 KBO에 진입하게 된 이상 기존 구단과 척을 질 이유가 없었고, 10월 25일 LG 측에 임선동을 양보한다.[13]

진로가 막힌 임선동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내세우며 LG 트윈스에 소송을 걸어 1심에서 LG의 지명권이 무효하다는 판결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JBO가 선수 등록을 허가하지 않으면서 다이에 또한 임선동을 포기하고 만다.[14] LG의 항소로 이어진 2심에서는 임선동의 일본 진출이 막힘에 따라 임선동이 일단 LG에 입단하고 2년 후 임선동이 원하는 구단으로 트레이드하는 형태로 조정이 된다.[15]

이러한 임선동의 행위는 야구계와 팬 사이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임선동을 비판하는 시각은 임선동이 프로야구의 규약과 계약관계를 무시했으며, 프로스포츠가 전체적으로 전력이 평준화되어야 보는 즐거움도 있고 판 자체가 커지는 성격이 있는데 그 기초가 되는 드래프트의 질서를 깨뜨렸다고 본다. 또한 임선동의 주장과 같이 프로야구의 질서에 문제점이 있더라도 임선동의 행위는 선수 전체의 권익 신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본인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었다고 받아들인다. 특히 임선동이 LG에 소속된 동안 2년차 시기에 사실상 태업성 플레이를 했다고 지적하며, 선수협 파동 때에도 선수가 아닌 구단 편에서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의혹도 있다고 비판한다.

 

 

반대로 LG와 KBO를 비판하는 쪽은 드래프트 자체가 명백한 담합 행위에 해당하며 애초에 LG가 임선동과 계약을 한 적이 없는 이상 LG가 입단을 종용하고 현대 피닉스나 다이에 입단을 실질적으로 방해한 것이 명백한 불법행위[16]인 것으로 본다. 드래프트 자체를 긍정하더라도 LG가 가진 것은 KBO라는 틀 안에서 협상을 할 수 있는 제한적인 권리에 한하며, KBO의 관할을 넘는 일본 프로야구나 한국 실업야구는 KBO의 규약이 제약할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1심은 헌법상 직업선택의 자유 침해와 공정거래법상 담합행위, 민법상 선량한 사회질서에 반하는 것을 이유로 기존 KBO의 지명권을 무효로 판결했다.

사실 미국식 프랜차이즈 제도[17]에 익숙한 대한민국 스포츠 팬들에게는 드래프트 제도가 익숙해서 별 말이 안 나오는 것이지, 드래프트는 근본적으로 헌법에 명시된 직업 선택의 자유를 무시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종목을 가리지 않고 이와 관련된 잡음은 꾸준히 터져나온다. 독일로 떠난 문성민, 1:8 트레이드로 이적한 황선홍, 상무로 도피한 양준혁이 대표적이며, 여자축구계에서는 팔자에도 없는 군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반대로 상무를 거부한 최유리같은 사례도 있다. 무엇보다 임선동의 문제를 야기한 당시의 드래프트 제도는 별도의 지원 절차가 없이 모든 고졸, 대졸 선수를 자동으로 드래프트 후보자로 묶었기 때문에 위법 요소가 더 크다. 2021년 이후 지원자에 한해 지명하도록 변경된 현재의 드래프트에서는 임선동이 고졸이든 대졸이든 각 시점에서 드래프트에 지원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애초에 분쟁의 여지가 없다.[18]

리그 전체의 이득을 위해 개별 선수의 권익을 제한하는 제도이니만큼 한번쯤은 생각을 해 볼 문제.[19] 기존 드래프트 질서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임선동 외에 드래프트 제도가 법적 분쟁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을 거론하기도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임선동에 데인 KBO 구단들이 MLB의 신인 스카우트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임선동의 소송으로 인해 과거 구단이 절대적인 우위에 있던 선수 보유 권리가 대거 무너졌다. 우선 1심이 진행중이던 1996년 2월에 지명 후 영구 보유권을 규정한 규약이 지명 후 2년 이내로 변경되었으며, KBO FA제도가 도입된 것도 임선동 분쟁으로 기존 지명권과 보류제도의 법적 근거가 부정된 영향이 크다.(#) 다만 원천적으로 가장 문제가 되는 지원 없이 드래프트 대상에 올리는 제도는 2020년까지 유지되었는데, 상기한 바와 같이 해외 스카우트로 회피하는 데 실질적으로 제약이 없었던 탓으로 이해할 수 있다.

 

2.3.1. 임선동 vs LG 소송 해설 글[편집]

손수호 변호사의 네이버 스포츠 에세이 '스포츠 보는 법'

2화. 이대은 은퇴, 그리고 풍운아 임선동 vs LG 소송 뒷이야기

차례

1. 이대은 은퇴

2. 천재 투수 임선동

3. 91년 LG의 1차 지명

4. 다이에 호크스 계약

5. 일본 진출 좌절

6. 임선동 vs LG 소송

(1) 1차전: 지명권 효력 정지 가처분(서울지법 남부지원)

(2) 2차전: 지명권 무효 확인 본안 1심(서울남부지법)

(3) 3차전: 지명권 무효 확인 본안 2심(서울고법)

7. 그 후 활약

8. 풍운아 임선동이 남긴 것

2.4. 프로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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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에는 소송 등을 겪으며 프로 입단이 미뤄졌다. 그래도 아마시절에 화려한 명성을 얻었고 대학 4년 내내 국가대표팀에 선출될 정도로 선천적인 재능을 타고났기에 1997년 입단 첫 해에는 11승 7패 평균자책점 3.52를 기록하며 신인 투수로서는 나름 잘해줬다. 코시에서도 2차전에 선발등판해서는 승리투수가 되었지만, 5차전에서는 패전투수가 되었고 팀도 5차전으로 한국시리즈를 준우승 마감한다.

다음해인 1998년에는 태업을 하면서 추락한다.[20]

1999년 1월 LG 측에서 안병원을 상대로 현대 유니콘스에 현금 트레이드된 후[21]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첫해에는 별로 신통치 못한 성적 0승 1패, ERA 8.05을 찍으면서 팬들의 빈축을 샀다.[22]

그렇지만 2000년에 갑자기 잠재력이 폭발했는데,[23] 18승 4패 평균자책점 3.36 174개의 삼진을 기록하면서 다승왕,[24] 탈삼진왕을 동시에 석권한다. 특히 한국시리즈 7차전에 마지막투수로 등판해 팀의 우승을 결정지으면서 헹가래 투수의 영예도 차지한다. 이 활약으로 KBO 골든글러브도 수상했고, 그해 9월에 열렸던 시드니 올림픽에도 출전해 동메달도 수상했다.

2000년 시즌 후에 에이스 정민태일본에 진출함으로써 임선동은 팀내 실질적인 에이스로 급부상하게 된다. 2001년에는 14승 8패 방어율 4.40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임선동은 갑자기 허리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해 이듬해 2002년에는 8승 6패[25] 4.51을 기록, 8월 말 시즌 중에 허리 통증이 심해지면서 시즌아웃되었다. 그래도 2002년까지는 나름대로 활약은 해줬지만 이후 부상이 심화됐고 훈련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2003년 이후로는 팀의 전력에 보탬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승수를 쌓지 못한 채 2007년 소속팀 현대에서 방출당하고 곧바로 은퇴했다.

결과적으로는 잠시 잘 나가기도 했지만 재능에 비해 롱런하지는 못했고 아마에서나 프로에서나 게으른 천재로만 남은 선수. 그래도 한 시즌이나마 골든글러브와 다승왕, 탈삼진왕을 거머쥐며 정상에 올랐던 점이 그의 넘치는 재능을 증명해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임선동을 탈쥐효과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가 애초에 역대급 재능을 지닌 선수였고 LG에서 1년차에 좋은 성적을 거뒀고 2년차는 태업이었음을 생각하면 틀린 말이다.

어떤 의미로는 1990년대에 매년 대박을 거두던 LG의 1차지명 역사에 이정길 이상으로 찬물을 끼얹은 빅 엿을 먹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고 덕분에 1997년이 되면 조성민을 1차지명으로 얻고 임선동과 함께 원투펀치로 써서 도합 30승은 거둘 수 있을 거라고 꿈꾸던 LG 팬들은 쓰라린 좌절을 맛봐야 했다.

 

2.5. 국가대표 경력[편집]

1993년 3월 호주 퍼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1993년 7월 미국 버팔로 유니버시아드

  • 예선 대만전 구원등판.기사.

1994년 8월 니카라과 세계야구선수권대회

  • 예선 캐나다전 선발등판.기사.
  • 예선 파나마전 구원등판 승리투수.기사.
  • 예선 네덜란드전 선발등판.기사1.기사2
  • 결승 쿠바전 구원등판.기사.

1994년 10월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 준결승 중국전 구원등판.기사.

1995년 8월 일본 후쿠오카 유니버시아드

1995년 9월 일본 구라시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1996년 7월 애틀랜타 올림픽

  • 예선 쿠바전 구원등판.
  • 예선 호주전 선발등판.

2000년 9월 시드니 올림픽

  • 예선 이탈리아전 선발등판 3이닝 2실점.
  • 예선 남아공전 구원등판.
 
 

3. 은퇴 이후[편집]

풍운아라는 별명답게 은퇴 후에는 부동산 중개업을 하면서 스튜어디스 출신 아내를 만나 잘 살다가 2015년경 이혼했으며[30] 결혼하기 전에는 방송인 박소현과 사귀었다.

야구계에서 떠나 잠시의 휴식을 가진 뒤 덕수중학교 투수코치로 잠깐 있다가, 2014년 자신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투수코치로 부임하였다. 살이 정말 많이 쪘다.

2018년에는 휘문고-연세대 동기인 석주일이 진행하는 아프리카TV 방송에 간간이 출연하고 있다.

2020년부터는 진영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 청룡기 대회에 참가한 이후 두 번째 출전 만에 팀을 16강에 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2020년 3월, 연세대 학내 스포츠매거진 <시스붐바>와 인터뷰를 가졌다.기사. 위에 나온 사진들보다는 제법 살이 빠진 모습이다.

2021년 1월 18일, 근황을 다룬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위에 나온 사진들과는 다르게 살이 매우 빠져서 그냥 건장한 체격으로 돌아왔다.1편. 2편. 참고로 키움이 현대의 후신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31]

2022년 5월, 임선동의 일대기를 다룬 기사가 인터뷰와 함께 작성되었다.기사.

 

4. 여담[편집]

응답하라 1994에서 잠시 언급되었다. 칠봉이의 설정과 같은 연세대학교 야구부 출신 거물 유망주였기 때문이며 그리고 대학 시절에는 자신이 칠봉이와 외모가 비슷했다는 망언을 했다.

농구부 쪽 인맥

연예계 쪽 인맥

대학시절 병역면제를 위해 무리하게 체중을 불린 적까지 있어서 위장이 커지다 보니 은퇴 후 리바운드가 더 심하게 온 것. 루키 시즌인 1997년의 LG트윈스 팬북에서도 선수들의 Q&A 페이지가 있었는데, 그 중 임선동은 '효과적으로 체중 감량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요?'에 답하는 것으로 나왔다. (물론 선수가 답변을 했을 리도 없지만) 결과적으로 체중 조절에 대해서는 현역때나 은퇴 후나 반면교사와도 같은 인물이다.

얼마나 위장이 컸냐면, 방송에서 푼 썰 중에 현역시절 전지훈련을 가서 짜파게티를 5봉을 한 냄비에 먹었는데, 먹고 나서 후배가 "선배님 치울까요?" 하고 묻자 "냅둬 2세트 시작해야지" 하고 말하고는 잠시 휴식 후 5봉을 또 먹어 총 앉은 자리에서 10봉을 해치웠다는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썰이 있을 정도였으며 저 몸을 보면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임선동열이라는 이름 말장난이 있다. 실제로 잘 나가던 휘문고 시절에는 이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재미있게도 투수 트레이닝 교본 "김건우의 투수훈련법"에서는 임선동의 투구동작이 좋지 못한 투구동작의 표본으로 실려있는데, 대조되는 좋은 투구동작의 표본으로는 선동열이 실려 있다. 실제로 고교 시절에는 제2의 선동열이였다.

키움 히어로즈에서 뛰어본 적은 없으나, 키움 히어로즈현대 유니콘스의 후신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애당초 히어로즈가 현대 유니콘스 전체를 인수한 게 아니라, 현대유니콘스는 해체하고 실업자가 된 선수들과 직원들을 고용하여 새롭게 창단했기 법적으로는 삼청태현의 명맥이 끊겼지만, 야구인들과 팬들중 정신적으로는 후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하다. 좋아하는 선수도 강속구 투수를 좋아해서 조상우의 열렬한 팬이라고. 이는 그가 피네스 피쳐였던 것도 이유라고 한다.

박명환야구TV에서 조용훈은 임선동의 화려한 입담을 칭찬했으며 LG에서의 활동 2년차인 1998년 가수 컨츄리꼬꼬의 데뷔곡 오 해피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다.

5.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WHIP
1997
22
135⅔
3.52
11
7
0
-
129
10
47
77
1.20
1998
15
59⅔
6.94
1
6
0
-
71
11
27
29
1.53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WHIP
1999
9
19
8.05
0
1
0
-
33
3
7
10
2.00
2000
29
195⅓
(3위)
3.36
(4위)
18
(1위)
4
0
0
177
13
68
174
(1위)
1.22
2001
24
159⅔
4.40
14
(3위)
9
0
0
201
10
46
77
1.53
2002
21
105⅔
4.51
8
6
1
0
118
12
31
61
1.34
2003
4
13⅓
9.45
0
2
0
0
23
2
4
4
1.95
2004
2
3⅔
17.18
0
0
0
0
9
0
6
1
3.27
2005
3
3⅔
17.18
0
1
0
0
9
0
3
3
3.27
2006
1
1
0.00
0
0
0
0
1
0
1
1
1.00
KBO 통산
(10시즌)
130
696⅔
4.50
52
36
1
0
771
61
239
436
1.39

6. 관련 문서[편집]

[1] 애초에 뛴 적도 없고 그냥 실업 야구팀인 현대가 지명권을 주장했었다.

[2] 그러나 고교 시절 삼대장이라고 불린 조성민과 손경수는 이후 너무나도 비참하게 몰락했다. 조성민은 전 국민이 알듯이 최진실과의 결혼 이후 몰락해 결국 2013년 자살로 삶을 끝마쳤으며, 손경수는 프로 무대에서 어떤 활약도 없이 조용히 은퇴해 간 질환으로 2016년 일찍 사망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셋 모두 아마추어 시절 받은 기대를 충족시키지는 못한 셈이 되었다. 박찬호가 이들 셋과 비교돼 더욱 높은 평가를 받는 것도 그래서이다.

[3] 조성현 연세대 감독의 제의로 모교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조성현 감독은 임선동에게 대학 선배이며, 덕수중 감독 시 임선동이 투수 인스트럭터로 근무했다.

[4] 상대 타자는 정수근.

[5] 같은 학교의 농구부 1년 후배가 서장훈, 2년 후배가 현주엽이다.

[6] 대학을 거치지 않고 고교 졸업 후 프로에 입단했다. 동기생으로 구분될 뿐, 92학번으로 불릴수는 없다. 또한, 정민철은 1년 유급한 72년생으로, 92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보다 1살 연상이다. 프로로 성공하고 나서 21세기부터 넣긴 하지만 정민철 본인이 직접 인정했듯이 고등학생때는 저들과 비교되던 수준이 아니었다. 박재홍은 임선동 1등과 조성민 2등까지 고등학교 시절 최고로 쳐주고, 자신이 차명주 등과 함께 5위 이내였다고 말했는데, 진행자가 정민철은 어떻냐고 묻자 직접적인 답변을 적극 피하며 "그 나머지는 보이지 않았어"라고 했는데, 정민철이 이 라인에 못 들어가는 이유는 가장 큰게 나이보다 실력 문제였다.

[7] 박종회 당시 홍익대학교 야구부 감독에 따르면, 손경수는 야구부 숙소에서 있는 일수가 1년 중 100일이 안 될 정도로 자기관리가 굉장히 나빴다고 한다. 잦은 음주로 인해 대학 시절부터 간염이 발병했고, 음주폭행도 잦았다고 한다. 이미 군 면제를 받았는지라 임의탈퇴 이후 3년 간 방황하고 나서 1998년 OB 복귀를 위해 입단 테스트를 받았는데, 결국 불합격하여 완전히 은퇴했다.

[8] 대학동기는 박재홍 등이 있다.

[9] (문동환 졸업 이후인) 대학 4학년 때는 자연스레 1선발 에이스가 된다.

[10] 결승전에서 임선동은 (선발투수 문동환의 조기강판 이후) 구원투수로 나와, 묵직한 속구와 타자의 바깥쪽과 안쪽을 정확히 찔러넣는 코너웍을 보여주면서 호투했다. 아쉽게도 9회에 끝내기 역전패를 당한 것이 옥에 티.영상.

[11] 일본야구기구(NPB)와 형식상 병존했던 조직으로, 2008년 이후 현재의 NPB로 일원화되었다.

[12] 이후 JBO는 KBO와의 협정에 기존 보유 선수 외에도 아마추어 선수 스카우트에 대한 불경쟁 조항을 넣었고, NPB 팀의 직접 스카우트는 사라진다.

 

[13] 현대는 프로팀 현대 유니콘스 명의이지만 임선동의 소송에서 피고인 LG의 보조참가인으로 참여했다.

[14]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이 소식을 들은 임선동은 격분하여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다가 상처를 입기까지 했다. 여기에 학점 미달로 연세대학교 졸업이 늦어졌고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에 뽑혔을 때 이 문제로 논란을 빚었다.

[15] 이상의 출처는 LG 트윈스의 당시 단장이었던 최종준스포츠현장탐색 기사(2016. 3. 2)

[16] '불법'은 형법 위반으로 한정되는 개념이 아니다.

[17] 메이저리그를 비롯한 미국의 프로스포츠가 프랜차이징, 드래프트 등 전방위적인 담합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1922년 연방 대법원 판결로 반독점법 예외를 인정받기 때문이다. 다만 해당 판결이 정확히 예외를 부여한 게 아니라 메이저리그를 어디까지나 국지적인 흥행사업으로 보아 연방법의 대상이 아니라고 판결한 것이어서 앞으로 뒤집어질 여지도 없지 않다. 한국의 경우 아예 담합 공인을 받은 적도 없다.

[18] 임선동과 비슷한 케이스가 1999년 이관우아비스파 후쿠오카 계약 파동이다. 그러나 야구와 달리 K리그의 드래프트는 당시에도 지원을 받아 선발했기 때문에 이관우는 드래프트를 무효로 주장할 수 없었다.

[19] 참고로 일본은 그래서 역지명 제도가 일부 있기도 했다. 또한, 그렇다고 드래프트 제도 자체를 없애자니 구단간 부익부빈익빈의 심화 등 부작용이 크게 나타날 우려가 높기에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 실제로 드래프트가 없는 유럽 스포츠는 빈익빈부익부가 심하며 해먹는 팀들만 해먹는 구조이다. 반면 드래프트가 있는 미국식 스포츠는 특정 팀이 오래 해먹기가 어렵고, 약팀들도 몇 년 버티면 해볼만한 경우가 많다. MLB에서 1965년 드래프트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뉴욕 양키스가 우승을 20번 했으나, 이후 60년 가까운 동안 7번의 우승으로 숫자가 급감했으며, 2000년 양키스의 3연패 이후, 아예 리핏조차 안나오고 있다.

[20] 2년차 징크스라기보단 다이에 호크스행을 무산시킨 소속팀 LG를 위해 열심히 뛸 의욕이 전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21] 전년도에 해태로부터 조계현을 데려왔으나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삼성이 7억을 지르자 현대가 1억 더 얹은 8억을 불러 성사시킨 것.

[22] 한편, LG로 간 안병원은 4년간 추격조로만 뛰다 은퇴했다.

[23] 이 시기 때 투수코치였던 김시진이 임선동을 상당히 신경써서 관리한 영향이 크다. 러닝훈련을 직접 감독하고 야식 먹는 것까지 일일이 감시했을 정도였으니. 사실 임선동은 연세대 시절 병역면제 판정을 받기 위해 엄청나게 체중을 불린 일이 있고 그 뒤로 구위가 상당히 저하된 상태였다. 그걸 되돌려서 포텐셜을 터뜨리게 만들었으니 정말 ㅎㄷㄷ하다.

[24] 정민태, 김수경과 공동다승왕.

[25] 팀내 다승 3위, 1위는 12승 10패 ERA 4.88을 기록한 김수경

[26] 대만은 직전해인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야구 은메달 팀이었다.

[27] 일본은 직전해인 1992년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야구 동메달 팀이었다.

[28] 영상 속에서 임선동이 상대하는 2번째 타자(2루타)는 다니 요시토모, 3번째 타자(희생번트)는 이구치 다다히토이다.

[29] 일본은 이듬해인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야구 은메달까지 차지한다.

[30] 은퇴 전 제테크 공부를 착실하게 했고, 용인에 투자한 부동산이 대박이 나서 수백억원대의 수익을 거두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 때 돈을 왕창 번 탓에 더 이상 야구에 동기부여가 되지 않아 은퇴했을 거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31] 이런 이유로 어느 팀을 응원하냐는 질문에 키움을 응원한다고 답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인 조상우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키움이 본인의 친정 팀인 현대의 후신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인 이유도 크다. 그 외에는 본인이 데뷔한 LG도 응원해서 1년에 두 번 정도 직관을 갔다고 밝혔다.

[32] 실제로도 임선동과 석주일은 절친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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