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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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수
金正洙 | Kim Jeong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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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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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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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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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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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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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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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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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1986~1999)
SK 와이번스 (2000)
한화 이글스 (2001~2003)
SK 와이번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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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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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2군 투수코치 (2004~2005)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06~2007)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2010)[2]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2011, 2013)[4]
KIA 타이거즈 3군 재활코치 (2017~2018)
KIA 타이거즈 재활군 코치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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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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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스카우트 (2008~2009)
KIA 타이거즈 전력분석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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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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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나도 처음 알았다 김정수 선수 야구 엄청 잘하는 사람이었구나 18시즌 통산 방어율3.28
김정수 선수가 야구하는 모습은 많이 보지 못했지만 어릴적 김정수 선수의 투구를보고 어 저사람 왜이렇게
볼이 빠르지라고 생각했던 기억이난다 그당시는 150키로가 잘 어뵤었는데 김정수 선수는 150에 가까운 볼을
던지고 있었고 거기다가 살아 움직이는 직구를 던지고 있었다 직구만 던져도 타자들이 어려웠을거라 생각된다
자 이제 투구 동작이다 오버 투수가아닌 쓰리쿼터 투수다 투구동작을 보고있으면 약간 임창용 선수가
생각난다 투구가 역동적이고 유연하고 부드럽다 만약 김정수 선수가 저 투구 동작으로 오버로 던졌다면
그저 그런선수 였을 것이다 상체를 앞으로 많이 숙이면서 골반을 놓치는 것을 방지했다
종종 오버투수가 공을 밀어던지다 싸이드로 바꿔 살아 있는 직구를 던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 골반을 놓치고 안놓치고의 차이지만 아무도 이것을 모르는것 같다
어째든 광주야구는 대단하다 선동열 이좀범 임창용 김병현
1962년 전남 화순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 화순에서 광주로 이사간 후 광주남초로 전학, 4학년 때에 야구부에 입단하면서 오른손잡이인데도 왼손으로 공을 던지는 '좌투우타' 스타일이 되었다. 이후 전남중학교를 거쳐 목포상업고등학교로 진학했으나 팀의 해체로 광주진흥고등학교 유니폼을 입게 됐다. 무명이었던 그가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1981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였다. 1회전에서 박노준, 김건우, 나성국 등이 포진된 당대 최강 선린상업고등학교와 대결하여 2-0 승리를 거뒀다. 김정수가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동대문야구장에 가니 사람들이 진흥고가 어디요? 실업계 고등학교인가? 묻는 사람들도 있었고 선린상고에게 승리를 거둔 그 다음날 "내가 내가 아니었다"라고 술회하였다. 1981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결승전까지 내달렸으나 선린상고와 함께 고교야구를 양분하던 경북고에 6-0으로 패하며 준우승을 차지했다.[8]
연세대학교 야구부[9]에 진학했으나 신입생 때 방황하며 팀을 무단이탈하여 광주로 돌아왔고 감독이 김정수의 부친을 어렵게 설득한 끝에 야구부로 돌아왔다. 선배들의 매질은 덤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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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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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파가 아닌 쓰리쿼터에 가까운 스타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당시로선 보기 드문 좌완 강속구 투수였지만, 그에 반비례하여 나쁜 제구력을 가져 볼넷과 몸에 맞는 공을 많이 내주었다. 그러나 '강철심장'을 가진 담력 센 투수로서의 특징이 KBO 한국시리즈에서는 큰 빛을 발하였다. 이혜천 + 유원상
1986년 한국시리즈 1차전 당시, 우승의 주역이 될 거라고 많은 이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선동열이 투런 및 밀어내기로 9이닝 동안 3실점씩이나 하며[10]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강판된 후 계투로 올라와 2이닝 4삼진 2볼넷 1안타로 틀어막고 승리 투수가 되었다. 그 다음 3차전에서도 기존의 해태 에이스 이상윤이 1이닝을 못 넘기고 난타당하는 등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등판하여 5이닝 2실점으로 틀어막고 구원승, 5차전에는 선발로 등판하여 당시 상대 팀 삼성 라이온즈의 에이스였던 김시진과의 맞대결에서 5이닝 2실점으로 판정승을 거두었다. 그 해 팀의 한국시리즈 4승 중 혼자 3승을 기록하면서 신인 최초로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였다.86년 한국시리즈에 또 다른 최동원이 있었다 이후에도 한국시리즈에서 맹활약을 펼쳐 한국시리즈 최다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거의 저승사자급으로 펄펄 날아다녔지만 정규 시즌에서는 그렇게 두드러지게 잘하던 선수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쁜 제구력 덕이었다고도 한다.[11] 하지만 김정수가 가을의 사나이가 된 가장 큰 원인은 부상 때문이다. 데뷔 초창기에는 매년 시즌 중에 부상을 당한 덕분에[12] 정규시즌 중에는 크게 활약을 하지 못하다가[13][14] 가을쯤 되면 부상이 완치가 되고 비로소 제 컨디션을 찾는 패턴을 반복하다보니 정규시즌의 성적에 비해서 한국시리즈의 성적이 특출나게 좋아보이는 효과를 가져왔고 이 때문에 여름까지는 안 보이다가 가을만 되면 돌아와서 맹활약하는 가을까치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타격 기계"로 유명한 장효조 선수에게 꽤 강한 편이었다.
1991년에는 정규시즌 중 빈볼을 던져 퇴장당한 사건이 있었다. 사건은 7월 14일 대구 원정경기에서 삼성이 좌투수용 오더와 우투수용 오더를 준비해 놓고 배대웅 코치가 해태 선발투수로 선동열이 등판한다는 사실을 슬쩍 확인한 후 우투수용 오더를 제출하려다 해태 김봉연 코치에게 들켜 난리가 났는데 해태 측에서 경기를 못 하겠다고 항의하는 걸 삼성 측에서 좌투수용 오더를 대신 제출하는 것으로 겨우 무마해서 경기는 진행되었는데 이 경기에서 선동열이 난타당해 1:7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구원등판 후 류중일과 이만수에게 연속 빈볼을 던져 퇴장, 이후 10경기 출장정지와 제재금 50만원의 징계를 받았다.
1996년에는 선동열이 일본에 진출하면서 공석이 된 마무리 자리를 어쩔 수 없이 맡았는데 쓰리쿼터에서 더욱 팔 각도를 내린 것이 주효하여 호성적을 기록했다.[15]
그러나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팀에서는 다소 푸대접을 받았다. 패넌트레이스에서는 별로 활약하지 못한 탓도 있고, 또 해태가 그다지 선수들에게 돈을 후하게 쓰던 팀이 아니었기도 했고..[16][17] 홀대에 대해서는 김응용 감독이 좌완을 좋아했다고 하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정작 김응용 감독은 끝끝내 제구가 교정되지 않은 김정수를 인터뷰에서 많이 깠다. 심지어는 "발로 던져도 내가 더 잘 던지겠다"고까지.. 결정적으로, 김응용 감독이 좋아하는 타입은 그냥 좌완이 아니라 권혁, 강영식같은 덩치 좋고 볼 빠른 좌완이었다.[18][19] 프로 데뷔 후 첫 FA 기회였던 2000년 시즌 전 FA 선언 때 해태 구단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결국 옛 쌍방울 선수단을 이어받은 신생팀 SK 와이번스로 원치 않게 사인 앤드 트레이드로 이적해야 했다. 후술하겠지만 FA 선수임에도 연봉이 삭감되었다.
하지만, 당시 사령탑이었던 강병철 감독은 젊은 선수들을 선호하는 편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기량 하락과 겹쳐 예전의 기량을 보여 주지 못한 채 2000년 시즌 후 1년만에 방출되었다. 원포인트 릴리프로 뛰었음에도 평균자책점이 7점대로 상승했으니 부활이 어렵다고 판단되었기 때문.
SK에서 방출된 후 테스트를 통해 한화 이글스에 입단하여 옛 해태 시절 동료 송유석과 재회했다. 당시 사령탑인 이광환 감독은 김정수 등의 베테랑 선수들을 등용하는 편이라 기회를 꽤 받았다. 한화에서 뛰던 2001년~2002년에는 불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2년 연속 10홀드 이상을 기록하며 리그 최고령 선수로 뛰었고, 좌타자 전문 원 포인트 릴리프로 활약해줬다.[20]
그러나, 2003년 시즌을 앞두고 젊은 선수들을 선호하는 유승안 감독이 부임하면서 설 자리를 잃었다. 이대로 은퇴하나 싶다가 2003년 6월 9일 현금 트레이드로 SK 와이번스로 돌아와 그해 리그 최고령 선수로 활동하며[21] 경기에 출장할 때마다 최고령 등판 기록을 세웠고,[22] 시즌 후반 8홀드를 올리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정규시즌 종료 후, 2003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만 41세 2개월 23일의 나이로 구원 등판하며 KBO 한국시리즈 최고령 출장기록을 세웠다.[23] 다만, 4차전 구원등판 상황에서 첫 타자인 전준호의 머리를 맞추고 칼같이 퇴장당한 것은 옥에 티로 남았다. 빈볼은 아니었지만 그 나이까지 여전했던 제구력 불안 때문에(…) 1996년 최해식에 이어 '통산 2번째 KBO 한국시리즈 퇴장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마지막 시즌에 출장한 한국시리즈에서 소속팀 SK가 준우승에 그치면서 최고령 우승선수 및 선수 시절 한국시리즈 진출 시 전부 우승이라는 대기록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당시 시점에서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경기 출장과(31경기, 한국시리즈만 계산했을 시 23경기) 최고령 출장선수(41세 2개월 27일) 기록에 이름을 남기고 은퇴할 수 있었다.[24]
2003년 10월 28일부로 SK 와이번스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SK에서 방출된지 이틀만에, 한화 이글스에서 2군 투수코치를 제의받고 바로 한화 코치를 맡으면서 은퇴했고,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이후 서정환 감독대행이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는 과정에서 2006년부터 친정 팀 KIA 타이거즈의 코치로 영입되었다. 도중에 감독이 교체되면서 스카우트 및 프런트로도 활동하기도 했다. 2010 시즌 데스기모토가 성적부진으로 2군으로 내려가면서 1군으로 콜업, 기존에 이강철 코치가 맡았던 1군 불펜코치를 맡았다.
2011 시즌 이후 전력분석 팀장으로 보직을 옮겨 잠시 지도자 생활을 내려놓았으나, 2013 시즌에 앞서 다카하시 투수코치가 해임되고 이강철 투수코치가 넥센 히어로즈의 수석코치로 이동하여 투수코치 자리에 공석이 생기면서 다시 2군 투수코치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2013년 8월 17일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1군으로 올라왔다.
전반적으로 코치 경력이 15년 가량 되었지만, 딱히 키워낸 선수도 없고 1군 코치로 있으면서 투수 교체라던가 여러가지로 실수가 많아서 코치로서의 능력이 높게 평가받는 편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서정환과 선동열시기의 투수코치였는데 그 시기 성적은 하위권을 맴돌기도 했을 정도. 물론 중간에 프런트로 전보된 이력도 있다보니 이건열, 백인호와 더불어 계속 한 팀에서 근속하는 철밥통 코치 이미지가 강하게 씌워진 감도 없지 않다.
2014년 이후로는 쭉 재활군에 있었기 때문에 존재감이 많이 희석되었다.
2022년 4월 1일에 선운지구에 김정수 피칭아카데미를 개업했다. 사회인 야구 지도를 주로 하며, 재활코치 경력 덕분에 선수 재활도 담당한다고 한다.
역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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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ERA
|
피안타
|
피홈런
|
사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86
|
41
(3위)
|
125⅔
|
9
|
6
|
5
(5위)
|
-
|
2.65
|
93
|
5
|
93
|
92
|
53
|
37
|
1.45
|
|
1987
|
23
|
80⅓
|
6
|
7
|
0
|
-
|
4.37
|
59
|
4
|
61
|
78
|
48
|
39
|
1.44
|
|
1988
|
11
|
54⅓
|
3
|
2
|
0
|
-
|
2.48
|
45
|
2
|
24
|
23
|
19
|
15
|
1.25
|
|
1989
|
9
|
54
|
2
|
2
|
0
|
-
|
2.67
|
47
|
0
|
26
|
39
|
18
|
16
|
1.32
|
|
1990
|
26
|
104⅓
|
6
|
5
|
0
|
-
|
2.93
|
84
|
5
|
69
|
50
|
46
|
34
|
1.38
|
|
1991
|
22
|
88⅔
|
6
|
3
|
2
|
-
|
2.54
|
59
|
4
|
37
|
52
|
25
|
25
|
1.04
|
|
1992
|
33
|
165⅓
|
14
|
8
|
1
|
-
|
3.16
|
144
|
11
|
98
|
126
|
68
|
58
|
1.34
|
|
1993
|
30
|
127⅔
|
10
|
8
|
1
|
-
|
2.75
|
102
|
11
|
70
|
96
|
47
|
39
|
1.19
|
|
1994
|
28
|
141
|
9
|
10
|
0
|
-
|
3.38
|
120
|
9
|
58
|
126
|
63
|
53
|
1.18
|
|
1995
|
26
|
108⅔
|
7
|
11
|
0
|
-
|
3.89
|
90
|
10
|
49
|
94
|
49
|
47
|
1.20
|
|
1996
|
40
|
76
|
6
|
3
|
18
(4위)
|
-
|
2.01
|
43
|
5
|
40
|
97
|
18
|
17
|
0.99
|
|
1997
|
41
|
80⅔
|
5
|
3
|
4
|
-
|
4.02
|
71
|
11
|
41
|
79
|
39
|
36
|
1.28
|
|
1998
|
37
|
39⅓
|
1
|
0
|
0
|
-
|
3.43
|
26
|
5
|
18
|
36
|
15
|
15
|
1.09
|
|
1999
|
48
|
35⅓
|
4
|
1
|
1
|
-
|
4.58
|
30
|
5
|
18
|
43
|
19
|
18
|
1.22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ERA
|
피안타
|
피홈런
|
사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00
|
50
|
31
|
1
|
4
|
0
|
3
|
7.55
|
40
|
5
|
17
|
23
|
26
|
26
|
1.74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ERA
|
피안타
|
피홈런
|
사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01
|
52
|
43⅔
|
2
|
2
|
1
|
10
(3위)
|
3.71
|
36
|
6
|
24
|
45
|
24
|
18
|
1.26
|
|
2002
|
47
|
25
|
1
|
2
|
1
|
12
(3위)
|
3.24
|
21
|
3
|
12
|
29
|
10
|
9
|
1.16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ERA
|
피안타
|
피홈런
|
사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03
|
36
|
13
|
0
|
0
|
0
|
8
|
4.15
|
18
|
0
|
9
|
3
|
6
|
6
|
1.85
|
|
KBO 통산
(18시즌)
|
600
|
1394
|
92
|
77
|
34
|
33
|
3.28
|
1128
|
101
|
764
|
1131
|
593
|
508
|
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