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선동열 기록에서 보듯이 혼자서 다른세상의 야구를 하고있다
오늘은 한국에서의 선동열의 투구와 일본에서의 선동열의 투구를 분석해보자
일단 피지컬이 좋다 키는180이지만 유연한몸이 강점이다
한국에서의 투구 동작을보면 문제점은 보인다 중심을 뒤에 두려고
하다보니 던저야 할 타이밍을 놓치고있다 한다디로 골반이 밀린다는 말이다
골반이 밀리면 팔이 앞에서 나오지 못한다 그러니까 동작이 됐다
않됐다 한다 그러다보니 높은볼이 자주나온다 그러나 투구 동작을 끝가지 가져가고
어떤 상황에서도 담담한 그의 성격은 일품이다
던지는 타이밍이 한박자느린 이 문제를 가지고 일본으로 간다
여기서는 봐주지 않는다 첫해 2군 추락 마음고생으로 체중도 많이 빠지고
뭐낙 탑클라스의 선수라 납득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다음해 한박자느린 투구동작을 보안해서 나왔다 킥모션을 짧게하고
바로 던지는 것이다 던지는 타이밍 문제를 해결하였다
최정상에서 추락한 선수가 다시 일어서는건 아마 선동열 입장에서는
한국방어율1.20보다 더어려웠을것이다 역시 탑은 다르다
아직도 선동열에 견주어 볼만한 한국 선수는 없다
그나마 오승환 이승엽이다 오승환 이승엽이 누군가 절대적인 존재 아닌가
선동열의 위상이 어느정도인지 가늠이 될것이다
선동열
宣銅烈 | Sun Dongyol[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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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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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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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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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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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동초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경영학 81[11] / 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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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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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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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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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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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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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1985~1995)
주니치 드래곤즈 (1996~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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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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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치 드래곤즈 2군 연수코치 (2003)
삼성 라이온즈 1군 수석·투수코치 (2004)
삼성 라이온즈 감독 (2005~2010)
KIA 타이거즈 감독 (2012~2014)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투수코치 (2006 / 2015 / 2017)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수석·투수코치 (2007)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7~2018)
구단 스프링캠프 순회 인스트럭터 (2001~2002)
LG 트윈스 스프링캠프 인스트럭터 (2021)
kt wiz 스프링캠프 인스트럭터 (20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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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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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훈장 맹호장
체육훈장 거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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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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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홍보위원 (2000~2003)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기술위원 (2015~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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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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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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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 주요 기록
5. 평가
5.1. 선수로서
5.2. 감독으로서
6. 수상
7. 기록
8. 플레이 스타일
8.1. 선동열 효과
9. 여담
9.1. 이름 표기에 대하여
9.3. 대중문화
9.4. 가족 관련
9.5. 야구 관련
9.6. 술꾼
9.7. 그 외
10. 관련 문서
해태 타이거즈 출신의 전 야구 선수이자 해태-KIA 타이거즈 최초의 영구 결번자. 현역 시절 포지션은 투수.
'무등산 폭격기'라는 별명으로 일컬어질 만큼 KBO에서 압도적인 활약을 펼치며 1980~90년대 타이거즈의 6차례 우승을 이끌었으며, 1996년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스로 임대 이적하면서 KBO 출신으로 해외 진출 1호 기록을 갖고 있다.
선수 은퇴 후로는 삼성 라이온즈, KIA 타이거즈, 2018 아시안 게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하였다.
현역 시절 별명은 국보, 무등산 폭격기[21],등이 있으며, 감독이 되며 살이 찌기 시작하고 항상 뚱한 표정을 하고 있어 붙은 별명인 선뚱 등이 있다. 주니치 시절엔 나고야의 호빵맨(앙팡만)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22]
선수로서는 투타 통틀어 KBO 리그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다. KBO에서 가장 위대했던 선수를 단 한 명만 선택하라면 이견의 여지가 없이 선동열인 것이다. KBO 리그 통산 WAR은 3위로[23] 1,2위가 타자이며 투수로는 1위이다 또한, 이러한 WAR 누적 수치를 최정이나 양준혁이 뛴 기간의 절반을 좀 넘는 11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에 쌓았던 전무후무한 선수다. 투수로 한정해보면 2위는 21시즌 동안 3000이닝을 던진 송진우가 약 69, 3위는 정민철로 약 59를 기록했다.[24][25] 주요 개인 기록은 통산방어율 1.20으로 규정이닝 0점대 방어율만 3차례 기록하였다. 타이틀로는 리그 MVP 3회, 골든글러브 6회, 트리플 크라운 4회, 방어율왕 8회[26], 다승왕 4회 등의 역대급 기록과 타이틀들을 보유하였고 당연히 모두 역대 최고기록이다. 1980~1990년대 최강팀 해태 타이거즈에서 에이스로서 6차례 우승(통합 우승은 3번)에 기여하였다. 주요 개인기록도 무시무시한 수준이지만 선동열만이 갖고 있는 자잘한 기록들 역시 무시무시한 수준인데 한 경기 최다 탈삼진 (18개)[27], 한 시즌 최다 완봉승 (8회), 최다투구이닝 무피홈런 (319이닝), 특정팀 상대 최다연승 (롯데상대 20연승)[28] 등 현역 시절 그의 커리어에는 이런 무섭기까지 한 기록들이 잔뜩 쌓여있다.
이후 34세의 나이에, KBO 리그에서 데뷔한 선수로는 최초로 일본프로야구(NPB)에 진출하여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는데[29] 첫 해는 고전했지만 이후 세이브 1위(구원 2위)까지 기록하고 불펜 투수임에도 당해 시즌 모든 투수 war 1위를 기록하기도 하며 리그 최고 수준의 마무리로 활약하다 은퇴했다. 선동열의 성공은 이후 이종범, 이상훈, 구대성, 이승엽 등 국내 탑선수들이 일본에 진출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또한 선동열의 슬라이더는 최동원의 커브, 류현진의 체인지업 등과 함께 KBO 리그 역대 최고의 변화구 중 하나로 손꼽힌다.
영광의 선수 시절과 달리 지도자로서는 평가가 갈린다. 한국시리즈 2회 우승에 아시안 게임 금메달 등 감독으로서 최상급의 커리어를 자랑하나, 그것과는 별개로 개인의 역량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남아있으며 그가 거쳐간 삼성, KIA 팬덤은 감독으로서의 선동열을 좋아하지 않는다.
감독 첫 해에 강력한 투수진을 만들어 내며 곧바로 우승을 이뤄내고 이듬해까지 우승하며 삼성 라이온즈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나 본래 타격의 팀이라는 별명에서 비추어 보듯 기존 삼성팬들이 익숙한 야구와 스타일이 달라서 시간이 흐를 수록 서서히 지지를 잃어갔다. 결정적으로 2010년 말년의 양준혁을 홀대하며 삼성팬들의 여론이 악화되었고 한국시리즈에서 스윕을 당하며 준우승을 했음에도 감독 자리를 이어가지 못했다.
긍정적인 면을 꼽자면, 오승환, 최형우, 박석민 등 삼성의 올타임 레전드들을 발굴하여 1군 주전으로 기용하며 세대 교체를 훌륭하게 해나갔다는 점이다. 이들은 팀의 최전성기를 이뤄내는 주축이 되었기에 그저 저평가 당하기엔 아쉬운 느낌이 많다.
반면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은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팬들의 절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감독직을 맡았음에도 포스트 시즌에 단 한번도 진출하지 못했을 정도로 성적을 내지 못했고 임기 후엔 오히려 팬들의 반대로 재임에 실패한다.
혹자는 서정환보다 조금 더 나은 감독 정도로 평가하기도 한다.[30] 물론 커리어는 한국시리즈 2회 우승, 1회 준우승으로 준수하고 리빌딩이라는 성과를 내기도 하였으나 커리어가 삼성에 있었기에 나온 것이라는 의견도 많았고[31] 결정적으로 여러 문제점으로 인하여 여전히 삼성, KIA 팬들에게는 이미지가 나쁘다. 2004년 삼성의 수석코치 겸 투수코치로[32] 취임하며 김응용 삼성 감독 아래서 감독 수업을 받았고, 이듬해 2005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에 취임하여 우승 2회,[33] 준우승 1회, 4위 2회, 5위 1회를 기록했다. 일반적인 팀이라면 좋은 성적이지만 감독으로 부임하는 동안 계속되는 성적 하락, 주축 선수들에 대한 혹사 논란,[34] 레전드 홀대[35] 등으로 재임 기간 동안 많은 팬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후 선수시절 친정팀인 KIA 타이거즈의 감독으로 영입되었으나 5위 1회, 8위 2회를 기록하며 좋지 못한 성적으로 팀을 암흑기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레전드(이종범) 은퇴 종용, 최희섭 홀대, 주축 선수들에 대한 혹사 논란 등은 다시 반복되었으며 삼성에서 받던 비판이 다시 KIA에서도 이어지며 결국 불명예스럽게 감독직에서 퇴장하였다.
- 선수
- 한국시리즈 우승 6회 (1986~1989, 1991, 1993)
- MVP 3회 (1986, 1989, 1990)
-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6회 (1986, 1988~1991, 1993)
- 승리 1위 4회 (1986, 1989~1991)
- 평균자책점 1위 8회 (1985~1991, 1993)
- 승률 1위 4회 (1987, 1989~1991)
- 구원 1위 2회 (1993, 1995)
- 감독
- 한국시리즈 우승 2회 (2005, 2006)
- 아시안 게임 금메달 1회 (2018)
- 우수 감독상 2회 (2005, 2006)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2012년 7월 20일 한-일 프로야구 레전드매치에서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이 때 TV에 소개된 투수 선동열의 통산기록이 화제가 되었다. 승리와 세이브 비율이 1:1에 가까운데다, 통산 평균자책점 1점대, 거기에 이닝보다 탈삼진 갯수가 많은데다 피홈런이 30개도 넘지 않는, 게임에서도 구현될 리가 없는 비상식적인 성적으로 수많은 팬들을 놀라게 했다.
- 해태 타이거즈 시절
- 367경기 146승 40패 132세이브 평균자책점 1.20
-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 162경기 10승 4패 98세이브 평균자책점 2.70
- 한국프로야구 입상내역
- 평균자책점 1위 8번 85~91년 7년 연속 포함
- 다승 1위 4번 89~91 3년연속 포함
- 승률 1위 4번 89~91 3년연속 포함
- 삼진 1위 5번 88~91 4년연속 포함
- 구원 1위 2회 (93, 95)
- 골든글러브 6회 수상 (86, 88~91, 93 투수부분 최다 수상자)
- MVP 3회 수상 (86, 89~90)
- 투수 트리플 크라운 3회 달성(89~91 방어율, 다승, 삼진, 승률 모두 1위, 86년의 경우 다승, 방어율, 삼진은 1위였으나 승률이 2위였고 당시의 트리플 크라운은 삼진이 아닌 승률이 포함된 의미였다. 오늘날의 의미로 보자면 트리플 크라운을 4회 달성하였다. 참고로 투수 트리플 크라운은 선동열을 제외하면 류현진과 윤석민이 단 1회 달성했을 뿐이다.) 승률 2위가 된 이유는 이 시즌 승률 1위는 최일언이다. 김형석이 최동원을 상대로 마지막 경기에서 3루타를 쳐내며 최일언이 패전을 면했고, 승률 타이틀을 차지하였다. 다만 이때는 탈삼진 부문이 없었다.
- 노히트 노런 1989년 7월 6일 대 삼성전에 달성
- 2005, 2006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한국시리즈 우승 2회 달성.
- 보유 기록들(역대 10위 내 기록만 기록)
- 역대 단일 시즌 평균 자책점 1, 2, 3, 5, 6, 7, 9위
- 역대 단일 시즌 R/9(9이닝당 실점) 1, 2, 4, 5, 6, 7, 8위
- 역대 단일 시즌 WHIP(이닝당 출루 허용) 1, 3, 4, 5, 6, 7, 8위
- 역대 단일 시즌 K/9(9이닝당 탈삼진) 2, 3, 4, 9위
- 역대 단일 시즌 K/BB(볼넷 대 삼진 비율) 1, 2, 5, 6위
- 역대 단일 시즌 OAVG(피안타율) 1, 2, 5, 6, 9위
- 역대 단일 시즌 이닝 5위
- 역대 단일 시즌 탈삼진 5, 6위
- 역대 단일 시즌 다승 6, 9, 10위
10위권 내의 기록이다. 50위 권으로 확대되면 더 많은 선동열의 이름을 볼 수 있다.
리그 수준이 현대보다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는 프로야구에서 최고구속 153km의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를 던진 시대&리그 수준 대비 압도적 최강의 파이어볼러다.
튼튼한 하체를 이용해 릴리즈 포인트를 앞으로 끌고 나와 공을 끌어올려 던지기까지의 과정에서 강한 허리 힘을 이용해 공에 체중을 싣는 형태다.[36] 릴리즈 포인트가 다른 투수들보다 앞에 있었던 덕분에 공의 위력이 좋았고 통통한 이미지와 달리 유연성이 매우 좋은데다 허리를 이용해 던졌다.
하지만 일본진출 첫해 이렇게 과하게 하체를 이동을 해서 던지는 투구폼 때문에 폼이 커서 주자견제에 어려움을 겪었고 상체가 빨리 나가거나 늦게 나가거나 하는 등 밸런스를 찾지 못해 제구 불안을 겪었다.
구종 면에 있어서는 포심이 주에 슬라이더를 가미하는 전형적인 투 피치이다. 특히 그의 슬라이더는 KBO 역대 최고의 변화구로 꼽힌다. 선동열의 슬라이더는 기본적으로는 종 슬라이더로, 횡으로 휘는 슬라이더를 던지거나 하는 등 다양한 슬라이더를 구사했으며, 구사하는 슬라이더에 따라 구속이 120km에서 130km을 넘나들곤 했다. 카운트를 잡기 위해서도 헛스윙을 유도하기 위해서도 슬라이더를 사용했다.
하지만 선동열은 슬라이더 외에 다른 변화구를 잘 던지지는 못했는데, 릴리즈 포인트를 워낙 앞으로 끌어 쓰다 보니 손목을 쓰기가 어려웠고[37] 손가락이 짧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선동열의 컴플렉스기도 했다. 선동열은 손가락이 길었던 이강철이나 정민철을 부러워했으며, 이광우가 했던 것처럼 손가락 사이를 찢는 수술 또한 고려했을 정도였다. 체인지업과 포크를 구사한 적이 있었으나 리그 전체로 봐도 평균 이하였다. 때문에 이런 구종은 다른 구종도 구사할 수 있는 선동열의 천재성을 설명하는 내용으로만 사용된다.
최고 구속은 NPB에서는 1997년 7월 6일 진구구장에서 기록한 153km/h이 최고 구속이다. [38] 최고구속에 대해 논란이 있긴 하나 1990년대 들어서야 스피드건이 보편화된 고로 이전의 구속 자료는 찾기가 어렵다. [39] 이런 선동열에게도 유독 강한 선수들이 있었으니 유승안, 김동기, 이병훈(야구) 등이 있다.
독보적 리그 최고의 투수로 군림했던 만큼, 선동열은 존재 하나만으로 타자들에게 엄청난 위압감을 주는 존재였다. 선동열이 나오는 경기는 대체로 포기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해태 김응용 감독은 이를 잘 이용하곤 했으며, 그게 큰 효과를 보인 것이 1988년 한국시리즈 6차전이다. 5회초 해태가 간신히 점수를 내자 김응용 감독은 손가락 부상으로 나갈 수 없던 선동열을 불펜에서 몸을 풀게 했다. 결국 상대팀이었던 빙그레는 1점밖에 못 내고 패배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선동열 효과'는 일본 진출 첫해 선동열의 엄청난 부진에 일정 정도 영향을 주었다. 선동열이 누군지 모르는데 국내에서처럼 심리적으로 억눌릴 리가 있나. 이를 두고 당시 하일성 KBS 해설은 선동열이 안일해졌다고 지적한 바 있다. 선동열 효과 때문에 타자들이 알아서 아웃카운트를 적립하고 선동열을 분석할 엄두조차 못 내는 이런 환경 속에서 KBO 최고일 수밖에 없는 선동열은 자연스레 나태해졌고, 이 때문에 일본에 진출해서 첫해에 그렇게 털렸다는 것이다. 선동열은 1996시즌이 끝나고 3천 구 투구와 폼 수정 등의 강훈련을 통해 리그에서 탑급 마무리로 도약하는 데 성공한다.
그가 현역이던 시절부터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팬이나 언론이 사용하는 표기로 '선동렬'(宣銅烈)과 '선동열'이 동시에 쓰여서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다. 허나 한국어 문법상 인명에서는 두음법칙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고 본인의 습관에 따라 결정하도록 되어있다. 따라서 원칙을 따지면 선동렬 쪽이 기본 발음이라 할 수는 있어도 선동열이라고 해도 문법상 전혀 하자가 없으며, 본인이 어릴 때부터 '선동열'로 사용해왔고 KBO에서도 '선동열'이라는 이름으로 등록이 되어있으므로 오히려 '선동열'이라고 적어야 맞는 표현이다. 이는 김응용 감독도 마찬가지다. 21세기부터는 위의 KBO 등록명과 본인 의사 존중 차원에서 '선동열'로 표기가 굳어졌다.
외국에 알려진 로마자 표기 철자도 Dong-yeol과 Dong-yol이 주축. 그가 사실상 처음으로 주력으로 활약한 세계대회인 81년 세계선수권대회 시절 미국 언론이 사용한 표기도 'Sun Dong-yeol'이었다.
주의할 것은 이는 본 문서가 가리키는 야구인 선동열에 한하며, 동일한 한자를 사용하는 다른 인물은 원하면 얼마든지 "(동)렬"이라는 표기를 쓸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전성기 때의 선동열과 비교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 단 한 명 최동원을 제외한다면. 선동열은 최동원을 라이벌이자 존경하는 선배로 인식하였고 최동원 또한 선동열을 라이벌이자 인정하고 존중하는 후배로 인식했다고 한다.
대결과 관련된 내용은 선동열 vs 최동원 문서 참조.
덧붙여 이선희, 장효조, 윤동균, 김봉연과 더불어 프로야구가 5년만 일찍 생겼더라면의 단골 떡밥[40] 중 하나였다.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아마추어 시절부터 두각을 보이며 MLB[41]로 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프로 입단 귀추가 연일 화제거리가 되었던 스타였으며, 프로야구에 들어와선 그야말로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하며 당대 최고의 스포츠 선수였기에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선수였다. 일례로 선동열 방어율이라는 표현은 80~90년대 학점이 낮은 대학생들을 이야기하는 유행어였을 정도.
1999년 은퇴 후 시간이 지나감에 서서히 지명도가 옅어지긴 했지만 여전한 파급력과 지명도를 자랑한다. 여전히 종종 대중 매체에서 다뤄지기도 한다.
- 2007년 영화 스카우트에서는 선동열이 사건의 주된 모티브가 되며, 등장신은 거의 없다. 거의 유일한 등장신으로는 마지막에 갈비 15인분을 먹는 장면 뿐... 한지붕 세가족의 순돌이 역의 아역배우 출신 이건주가 선동열 역을 맡았다.
- 2012년 영화 퍼펙트 게임에는 양동근이 선동열 역을 맡았다.
- 흔히 외아들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2남 2녀 중 차남으로, 5살 연상 형(선형주)이 있었다고 한다. 선형주가 16살 때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 외아들로 알려지게 된 것. 한 인터뷰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야구를 처음 시작한 것도 또 지금껏 좌절하지 않고 야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형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 아내인 김현미는 광주 태생으로 이화여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한항공 스튜어디스로 근무하다 선동열과의 연애를 거쳐 1990년 1월 14일 광주 신양파크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42] 첫 만남은 1989년 11월 팀이 한국시리즈 4연패를 달성한 직후였다고 한다. 즉, 만나고 두 달 만에 초고속으로 결혼을 한 것이다. 신혼 시절 아내와 함께 자니 윤쇼에 출연했었다.영상 보기
- 아들 선민우는 특전사에서 군 복무를 마친 후 골프 선수로 활동 중이다
-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 2021년 11월 28일 방송된 골벤져스에 아들 야구 레전드 패밀리로 아들 골프선수 선민우가 출연했고, 선동열은 영상편지로 "아들 민우가 처음으로 방송에 출연하는데 편안한 마음으로 라운드라고 생각하면서 하면 좋을 것 같다. 편안하게 치고 파이팅"이라고 응원하기도 했다. #
- 선동열은 아버지 선판규 씨[43]의 열성적인 지원으로 학창시절부터 몸을 관리해왔다. 선동열이 어릴 때부터 몸에 좋다는 것은 천리 밖에서라도 구해 와서 먹였는데 뱀이나 개구리 정도는 양반이었고, 심지어 오소리의 생피까지 들이킬 정도였다.[44] 덕분에 선동열은 대단한 강골을 갖출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런 걸 먹는다고 몸이 좋아지는지는 의문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선지는 지방은 없으면서 단백질, 비타민, 칼슘, 철분 등이 풍부한 영양식으로 현대의 종합영양제 내지는 보충제나 다름없는 효과가 있다. 지금 같다면야 이런 보양식보다 훨씬 저렴하고 효과도 좋은 영양제를 먹는 것이 효율이 좋겠지만 그런 영양제가 없던 당시 오소리나 사슴 피 정도면 나름 최고의 영양제였으며, 게다가 개구리, 뱀 고기도 다 단백질인 만큼 일반인들은 고기반찬도 먹기 힘든 시절 개구리, 뱀 등의 고단백 식단을 자주 먹으면서 꾸준히 운동을 해왔으니 몸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45]
- 덧붙이자면 선판규씨는 염증 회복에 좋다는 말고기를 가격 불문하고 사들여서 선동열에게 보내 주었는데, 선동열은 그 말고기를 먹은 것이 아니라 어깨에 붙여 통증을 달랬다고 한다.
- 5.18 민주화운동 당시 선동열의 아버지인 선판규 씨가 운영하는 광주 송정리 소재 여관에 잠시 기거하던 방수원[46]이 계엄군에게 변을 당하기 직전에 선판규 씨 덕분에 살아남은 적이 있다. 계엄군을 싣고 달리던 군용 트럭을 향해 그 동네의 신원 불명 청년[47]이 주먹감자를 날린 것을 본 계엄군이 트럭에서 내려 청년을 뒤쫓다가 여관으로 쳐들어왔고, 마당에 있던 방수원의 가슴팍에 다짜고짜 대검을 꽂은 총을 들이대며 "아까 그 새끼 어디갔냐?!" 고 을러댄 것이다. 영문을 모르던 방수원은 그저 양 손을 올린 채 벌벌 떨고만 있었는데 마침 볼 일을 보고 돌아온 선판규 씨가 이를 보고 놀라면서 계엄군 장교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나는 선동열의 애비요. 얘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지만 운동만 하는 녀석들이라 아무것도 모르니 제발 한번만 봐주시오" 라며 통 사정했다. 다행히 장교 한 명이 선동열을 잘 아는 야구팬이라 이번 일은 없던 걸로 하자며 병력을 철수시키면서 방수원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48]# 후일 방수원은 손가락이 짧아 포크볼을 잘 못던지던 선동열에게 슬라이더를 던져 보라고 권유하여 그립을 가르쳐 주었는데, 선동열은 이 슬라이더를 자신만의 무기로 갈고 닦아 오랫동안 잘 써먹었다.[49]
- 일본 활동 시절 굉장히 많이 노력했던 걸로 유명한데 일본어 공부 역시 열심히 했던 걸로 유명하다. 그 결과 일본어 실력이 상당히 출중해졌다. 그리고 2017 WBC 대회 때 일본 기자들과 인터뷰했는데 20년이 지나도 여전한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보여준다. # 이는 박찬호, 추신수, 박지성, 손흥민 등과 함께 해외리그에서 잘 적응하여 성공한 스포츠 스타들의 모범사례로 거론된다.
- 선동열의 조카 손녀[50]인 선주하 양이 2022년 유소년 야구팀 세종 엔젤스에서 뛰고 있는 것이 프로동네야구 PDB를 통해 알려졌다. 영상
- 불암콩콩코믹스 레전드 선동열편
- 서글서글한 이미지와 더불어 굉장한 학구파다. 일본에서 일본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본어를 유창[51]하게 구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에 스포츠 신문에 야구 컬럼을 연재했는데 그 퀄리티가 놀라운 수준이다. 투구학 개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시리즈를 일독해보자.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이는데 열려있고, 메이저리그의 투구이론은 물론 세이버 매트릭스에 대한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2006년 올스타전 식전 행사로 열린 25년 올스타 vs 연예인야구단과의 경기에서 1회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하체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던지면서도 130km/h가 넘는 공을 던졌다. 결과는 1이닝동안 이휘재, 윤종신, 허준호를 상대로 각각 삼진, 파울 플라이, 삼진을 얻어 삼자범퇴로 막아냈다. 최고구속은 134km/h. 허준호 삼진잡는 장면. 이 2006년 경기는 준비를 거의 하지 않고 던져서 저런 공이 나온 것이다. 몇 주간 준비를 하고 나왔던 2005년 올드스타전에서는 경기 전 구속 측정 이벤트에서 138km/h로 2위를, 경기를 마무리하러 나와서는 무려 140km/h를 던졌는데, 다음날 올스타전 방송인터뷰에서 손민한과 권오준은 전날 경기를 보고 자신들에게 한숨이 나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 때 김태원(야구선수)도 140km/h를 찍었지만 선동열 때문에 묻혔다.
- 삼성 라이온즈에 있을 당시 박한이에게 "지금 던져도 너 정도는 문제없다."라고 일침을 가한 적이 있다.
- 지금도 현역 때의 공을 던질 수 있다면 가장 붙어보고 싶은 타자로 이대호를 꼽았다. 삼구 삼진으로 잡을 자신이 있단다. [10대1 인터뷰] 선동열 "현역 때 공이면 이대호 삼진 잡겠지"
- 이대호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KBO 역사상 최고의 기록으로 선동열의 통산 평균자책점 기록을 꼽은 바 있다. 그것도 상당히 확고하게 꼽았는데, 자신의 7관왕이나 연속홈런 기록, 이승엽의 56홈런 기록보다도 확실히 더 위대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심지어 진행자가 영상에 안 나온 최동원의 기록과 비교했을때도, 이대호는 "그럼 그것과 1, 2위를 경쟁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래도 난 선동열 감독님의 기록이 여전히 1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 시즌이 아니라 KBO 선수생활 전체 통산에서 그런 말도 안되는 평균자책점 수치가 나온다는 건, 미래에도 다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대호가 말한 선동열의 기록.
-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 2006년도에 2년차인 오승환은 아직 자신과 비교하려면 멀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이유는 자기는 16m 지점에서 공을 뿌렸는데 오승환은 18.44m 지점에서 공을 놓으니까. 선동열 감독, "오승환 나보다 못해!" 실제로 오승환이 18.44에서 놓는건 아니고 더 배워야 한다는 말. 공 끝이 좋다는 칭찬도 같이 해주었다.
-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스포츠 세계에서 2등은 꼴찌하고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 상당히 유명한 짤.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꼴찌를 기록해서 감독직에서 잘렸다는 우스갯소리도 돌곤 했었다. [52] 다만, 이 표현은 스포츠에서 1등만이 살아남는 프로 선수들의 치열한 경쟁과 승부의 냉정함을 보여주는 발언이다. 2022년 본인이 작성한 칼럼에서도 다시 한번 언급했다.#
- 1993년 시즌을 앞두고 스포츠서울의 제의로 선동열의 실전강의 라는 타이틀의 특집 시리즈를 지면에 게재했는데 당대의 최고 투수인 선동열이 장종훈, 김기태, 이정훈, 장효조 등등 당시 국내의 유명 타자들을 어떻게 공략하는 지 집중 분석하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선동열 자신의 영업 비밀인 타자 별 볼 배합 등 피칭 요령을 만 천하에 까발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특집이었지만 선동열은 의외로 흔쾌히 취재에 응하여 20회 분을 연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0회 정도 연재되었을 즈음에 스포츠서울을 본 김응용 감독이 "아니 이 미친놈이 지금 뭐하는 짓이야?!" 라고 노발대발 하며 선동열을 부르자,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짐작하면서 김응용에게 갔다.
김응용: 야 이 멍청한 녀석아, 너 야구를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선동열: (모르는 척 능청떨며)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김응용: 여기 신문에 나온 기사 말이야! 타자를 상대하면서 네 비밀을 몽땅 털어놓는다는게 말이 되냐? 그러고도 네가 앞으로 계속 투수로 뛰겠다고? 앙? 지금까지 누구누구 했어?
선동열: 아 네, 김재박하고 이해창, 박종훈, 장효조... 아무튼 은퇴한 타자들만 했습니다.[53] 미쳤다고 현역 선수들 공략법을 말하겠습니까?
김응용: 그래? 그나마 좀 낫군. 아무튼 더 이상은 안돼. 절대로 하지 마.
선동열: 네 알겠습니다.
사실 김응용이 격노한 이유는 선동열이 지난 해인 1992년 어깨 부상으로 시즌을 말아먹었는 지라 1993년 시즌 선동열의 부활이 가능할 지 미지수인 상황에서 본인의 무기를 공개하겠다는 것에 화들짝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선동열은 "내가 직구를 던진다고 하고 던져도 못 치는데 어느 정도 피칭 노하우를 공개해도 지장은 없지 않겠는가?" 라는 자신감으로 거리낌 없이 기사를 연재한 것이었다. 아무튼 이 특집은 김응용의 제지가 들어왔지만 그나마 모양 사납지 않게 자연스레 끝낼 수 있었고, 선동열은 그 해 마무리 투수로 전업하여 평균자책점 0.78에 41세이브포인트를 거두는 맹활약을 보이며 이 특집기사가 자신에게 절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 현역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는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결승전, 1987년 최동원과의 15이닝 완투 무승부 등을 주로 꼽곤 한다. 모교 고려대학교의 학보인 고대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고려대-연세대 정기전을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꼽기도 했다. 자리가 자리다 보니 립서비스일 수 있겠지만, 세계야구선수권 때보다 고연전 등판 때가 더 떨렸다고.
- 소싯적에 말술을 자랑하는 굉장한 술꾼이었다. 특히 프로에 들어와서는 예컨대 고려대 시절 절친이던 MBC 청룡의 정삼흠이 선발 맞대결 전날 저녁에 선동열을 불러내어 다음 날 새벽까지 부어라 마셔라 해놓고, 그 날 저녁 그 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마운드에 올라 정삼흠은 7이닝 5실점, 선동열은 완봉승을 거두었다고 한다.(1987년 9월 2일 잠실 MBC전)
- 그리고 국가대표 시절 태릉선수촌에서 친분을 쌓았던 농구계의 대표 말술로 악명높은 허재가 농구대잔치 일정 차 광주광역시로 내려왔을 때, 경기를 마친 허재를 불러내어 밤새도록 술을 펐다고 한다. 술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허재도 3차, 4차까지 가는 강행군에 기진맥진 하며 선동열에게 끌려다녀야 했고, 후에 허재는 처음으로 '술 먹다 죽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아득해졌다고 회고했다. 그러던 차에 야밤이 되어 광주시내에 문을 연 술집이 눈에 띄지않게 되자, 허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선동열이 어떤 주점 앞에서 내려진 셔터를 두들기며 "나 선동열이요. 문좀 열어 주소" 하자, 주인이 셔터를 벌컥 올리고 반색을 하며 선동열과 허재를 안으로 들였다고 하며 결국 견디지 못한 허재는 화장실 간다는 핑계를 대고 바로 숙소로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이렇게 실력과 주량으로 리그를 평정했던 두 종목의 대표가 붙은 전설의 매치업은 선동열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전날 그렇게까지 마신 선동열이 걱정이 되어 신문을 확인해보니 "해태 선동열, 오늘도 완봉승!" 이란 기사가 떡 하고 올라왔다고 한다. 다만 완봉승에 대해선 허재가 무릎팍도사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증언했다. 애초에 농구는 겨울 스포츠고, 야구는 여름 스포츠이니 말이 안 되는 셈.
- 그러나 당시 호흡을 맞춘 배터리 장채근의 증언에 의하면, 일기예보를 믿고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가 날이 개서 출전한 적이 종종 있다고 한다. # 당장 위에 있는 정삼흠과의 음주 맞대결 일화에서도 완봉승을 거두었고, 선동열의 커리어 마지막 완봉승 또한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술 마셨다가 경기 당일에 비가 잦아들어서 등판해, 완봉승을 따내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건초염에 걸려 92시즌을 날리고 마무리로 전향했다.
- 이런 천하의 주당[54]인 선동열이었지만, 마실 술 다 마시고도 몸 관리만큼은 철저했고 시합에서도 꾸준히 제 실력을 보여주었기에, 철권통치의 아이콘 김응용 감독도 선동열에겐 절대로 간섭하지 않았다고 한다.[55] 사실 김응용은 야구만 잘 한다면 그 선수의 사생활에 관해선 절대로 터치하지 않았다. 반면 경기에서 지거나 실력은 그저 그런 선수가 일탈을 저지르면 말 그대로 헬게이트를 여는 권능을 보여줬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양승호다.[56][57]
- 다만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에 간이 나빠졌다는 진단을 받았고, 이후 그동안 즐겼던 술과 담배를 모두 끊었다고 한다. 이후로는 건강에 신경쓰면서 개인운동도 많이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지만 전설의 타이거즈편에서 정회열이 해태 내의 주당 선수들을 언급할때,[58] 동열이 형은 지금도 술 잘드신다고 말한것을 보아 술을 줄였다면 몰라도 끊었다는 건 루머인듯 하다.
- 의외로 한창 술을 즐기던 시절에 절친이자 술친구인 허재와는 달리, 주취폭행이나 음주운전 같은 술 관련 사건사고는 없다.[59] 다만 음주로 인해 본인이 사고는 안 쳐도, 몸 자체가 망가져 커리어가 박살나는 부상은 많이 겪은 편이다.[60] 반대로 허재는 술 관련 사건사고는 많이 쳤어도, 술로 인한 부상은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술로 인해 건강 잃은 건 은퇴 후 한참 뒤인 2024년에 밝힌 일이었다.
- 1980년대 전성기 시절 광고를 찍었는데, 선동열은 당시 안국약품[61]이 생산하고 판매한 '투수코친'이라는 감기약 광고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런데 선동열이 약품에 효능에 대해서 말하는데, 선동열의 목소리가 아니라[62] 성우 한상덕이 더빙한 목소리다.[63] 이 더빙은 디시인사이드에서 합성으로 가끔 사용되기도 했다.
- 1988년 어린이날에 KBS에서 방송된 애니메이션 아기공룡 둘리2에서 카메오로 등장해 대형홈런을 허용한다.[64]
- 한국프로야구에서 굵직한 기록과 사건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이름이 유명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보기 드문 성씨(선 씨)이기 때문에 선동열과 관련된 기사에서 헤드라인을 뽑을 때 그의 이름 대신 성씨를 로마자로 바꾼 'SUN'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프로야구 등록 선수 중 유일한 선씨이기 때문에 선이라고 하면 선동열일 수밖에 없다. 야구 아는 사람은 SUN만 봐도 다 선동열로 알아 듣는다. 우연히도 로마자 SUN으로 표기된 단어를 영어에서는 '태양'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기에 '나고야의 태양'이라는 별명 탄생에도 일조했다. 정작 일본에서는 앙팡만이라고 했지만.
- 선동열이라는 이름은 대학교에서도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선동열 학점이다. 선동열 학점이라 함은 바로 선동열의 최전성기 시절의 방어율이 학점으로 나오는 현상이다. 0점대면 선동열 학점 확정이다. 2023년 현재는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지 커쇼, 혹은 류현진 학점이라고 하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 흑역사 혹은 웃긴 추억이 있다. 이종범, 양수경과 Two&One이라는 그룹을 결성한 적이 있었다. 노래를 잘해서가 아니라 해태가 하도 연봉을 짜게 줘서 우승을 한 1993년에도 500만원의 격려금만 주자, 부수입을 벌기 위해 구단이 추진하여 이거라도 해본 것이다. 결과는 처참. 앨범이 거의 팔리지 않았다. 게다가 호랑이 감독이자 야구 외 다른 일 하는 걸 싫어하는 걸로 유명한 김응용 몰래 했던 일이라, 나중에 김응용 감독에게 혼난 적이 많다고 한다. 특히 이 앨범을 낸 직후 스프링캠프를 갔을때 하필 어느날 선동열과 이종범 각각 손목과 발목을 삐어 같이 훈련을 쉬는 날이 오자, 음반 활동 때문에 두사람의 집중력이 떨어져서 잔 부상을 당한거라고 느껴 짜증이 난 김응용이 구단 매니저를 불러 "야! 저 새끼들 그냥 나이트나 보내 개쉐끼들!"[65]이라며, 돈 벌려고 그거 한 애들이니 다쳐서 훈련 못 할거 그냥 밤 무대 행사나 보내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1994시즌 내내 두 선수 성적이 부진하면 저 일 때문인지 화가 나서 한 번씩 불러서 갈궜다고 하는데 다행히 두 선수 다 후회하고 야구에 집중하여 성적이 좋은 해였기에 갈군 적이 극히 적었다고 한다. 그 해 이종범은 MVP가 됐을 만큼 최고의 해였다. [66]
- 반대로 일본에 진출했을 때는 당시 일본에서 엔카 활동으로 상종가를 올리던 김연자가 선동열 헌정 응원가 'Big Don Dong Yol'을 발매하기도 했다. 1996.02.29 중앙일보 기사
- 패션 센스가 촌스러운 편인데 위 사진들에서도 보이듯 바지를 최대한 끌어올려 입는, 소위 말하는 배 바지 스타일을 좋아한다. 알다시피 다리 길어 보이라고 바지를 끌어올려 입는 것인데, 어째 나이가 들수록 더 끌어올려 입는다. 사실 선동열 젊은 시절이던 1980년대만 해도 바지 안에 옷 집어넣고 바지 끌어올려 입는 건 매우 흔한 패션이었지만 유행이 바뀌어 자연스러운 신체라인을 추구하게 된 2010년대 들어서는 매우 촌스러운 패션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얼굴이 큰 편이라 작은 상체가 도드라져 보여 더 부자연스럽다. 여튼 야구팬들 사이에선 바지 팽팽하게 끌어올려 입는 1980년대 배바지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삼성 감독 시절 안지만이 선동열 배바지를 흉내내는 사진이 있을 정도였다. 패션 감각은 공 던지는 솜씨와는 다르게 별로 좋지 않다.
- 은퇴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미스코리아 심사위원을 본 적이 있다.#
-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많은 경기에서 오심이 많이 나와 선동열의 항의가 빈번했다. 그때 당시엔 비디오 판독 제도가 활성화 되지 않았고 선동열의 항의부분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방송카메라로 애매한 판정을 확인할 때 덕아웃에서 본 선동열의 눈이 경기를 바로 앞에서 판단하는 심판보다 정확한 판단을 했다.
- 세가의 아케이드 야구 게임 다이너마이트 베이스볼 '97 오프닝[67]에서 타자 배트를 몇 개나 파괴하는 것으로 나온다. 끝에는 홈런을 맞지만. 선동열 외에도 당시 NPB 마무리 투수들은 오프닝에서 배트를 부쉈다. 헌데 어찌 된 일인지 해당 게임의 오프닝에서 선동렬은 좌완으로 등장한다(...)
- 삼국지 시리즈에서 유선의 일러스트가 대대로 선동열과 매우 닮았다.
- 현역 시절 사진과, 183cm 97kg라는 프로필에 비해 체형이 상당히 특이한 편이다. 얼굴에도 살이 많고, 몸통과 다리도 굵고 다부진 체형이지만, 팔은 근육이 적고 무척 가늘다. 공교롭게도 메이저리그 전설의 투수인 그렉 매덕스 역시도 선동열처럼 몸통과 다리만 두껍고 팔은 가느다란 체형이다.
- 고등학생 때부터 얼굴에 여드름이 너무 심해서 한때는 사람이 많은 곳에 가길 꺼릴 정도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붙은 별명이 멍게였고, 나이를 먹은 지금도 얼굴에 그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고려대학교 입학 후엔 3년 선배이자 룸메이트였던 김경문과 함께 서울역 근처에 위치한 유명 피부과에 한달 용돈을 대부분 바치다시피 했었다고 한다. 김경문도 당시엔 턱 밑에 여드름이 상당히 심했어서 선동열을 데리고 피부과에 같이 다녔다고.
[1] 1986년, 1987년, 1993년. 규정이닝 기준 0점대 평균자책점을 달성한 선수는 아직까지도 선동열이 유일한데, 이걸 세 번이나 했다.
[2] 1985년~1991년
[3] 13이닝 기록. 정규이닝 기준 최다 탈삼진 기록은 류현진(17K).
[4] 9이닝당 피홈런 개수
[5] 1986년 8월~1987년 4월. 2위 기록도 1995년 46⅓이닝으로 선동열이 보유. 선발 등판 기록만 합산하면 37이닝으로, 이는 2012년 서재응이 44이닝으로 경신했다.
[6] 1989 플레이오프 3차전 태평양전
[7] 1988년 8월 11일 ~ 1995년 9월 26일. 이후 이 기록이 깨지지 않은 상태에서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했고, 거기서 은퇴하면서 기록이 마감되었다. 즉, 롯데는 1988년 이후 선동열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적이 없는 것이다.
[8] 마지막 글자 烈의 본 발음이 '렬'이므로 '선동렬'이라고 아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본 문서가 가리키는 야구인의 이름은 '선동열'로 적는 것이 맞다. 자세한건 9.1번 문단에 후술.
[10] 보성 선씨 참판공파 집성촌으로, 선거이 장군의 정려도 이 마을에 있다. 선거이 지려
[12]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5/07/01/2005070170220.html
[13] 당대 최고의 스타답게 지역 홍보대사부터 공공기관 홍보대사까지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었다.
[15] 모태신앙으로 어머니(마틸다)가 매우 독실한 신자였다. 아내(헬레나), 아들(안드레아), 딸(크리스티나) 모두 천주교 신자이다. 대구대교구 100주년 기념 성당의 건립에 1억 원을 기부한 바 있다. 이 성당은 범어 대성당으로 불리며,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공동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우연히도 당시 천주교 대구대교구 교구장인 조환길 타대오 대주교와 세례명이 같다.
[16] 참판공파 22세손 동(銅)자 항렬
[17] You are my sunshine! 광주의 태양! KIA의 선동열! 워어어어~ You are my sunshine! 광주의 태양! KIA의 선동열 감독님~
[18] 승장 감독 인터뷰 시에 관중석에서 응원가를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곡은 오정복이 삼성 라이온즈 시절에, 두산 베어스의 옛 외인타자 잭 루츠가 쓴 적이 있었으며, 안양 KGC인삼공사 농구단도 공격시 응원가로도 썼었다.
[19] 262⅔이닝-214탈삼진
[20] 203이닝-210탈삼진
[21] 당시 스포츠서울 야구 기자이던 신명철이 붙여준 별명이다.
[22] '나고야의 태양'은 국내 시절 별명 중 하나이던 '광주의 태양'을 국내 언론들이 임의로 연장한 국내 별명에 가깝고 일본에서의 주 별명은 앙팡만이었다. 한국에서는 나고야의 태양이라고 불렀다.
[23] 스탯티즈의 계산방식 개편으로 상당히 하향되었다
[24] 최정과 송진우의 차이를 보아도 알 수 있듯 war을 쌓기에는 투수가 타자보다 불리하다.(KBO 뿐만 아니라 NPB나 MLB에서도 마찬가지) 그럼에도 선동열은 war을 가장 많이 쌓은 타자들보다도 더 많은 war을 11시즌만에 쌓은 것이다.
[25] 또한 역대 단일시즌 투수 RA9-WAR 순위를 정렬하면 1,4,6,9,10,12,13,18위가 선동열이다. 심지어 2위는 말도 안되는 정도의 이닝을 먹은 1983년 장명부인데 1986년에는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등 리그를 폭격하며 이마저도 넘어섰다.
[26] 11시즌 중 그가 규정이닝을 채운 8시즌 모두 방어율 1위였다. 그야말로 마운드의 지배자.
[27] 연장 기록까지 포함이며 한 경기 정규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은 류현진이 2010시즌에 17개의 삼진을 잡으면서 가지고 있다.
[28] 88년부터 95년까지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20연승을 기록했다. 이 연승 기록의 재미난 점은 20연승의 종료 이유가 선동열이 패전을 해서가 아니라 95년 이후 일본리그에 진출한 뒤 거기서 은퇴를 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29] 참고로 KBO 리그 출신으로 NPB에 선동열보다 먼저 진출한 선수는 김일융이 있지만 KBO리그 데뷔가 아니고 NPB에서 뛰다가 한국에 온 뒤 리턴한 케이스다. 한국인 NPB 선수도 장훈, 백인천등의 유명한 선례가 이미 있었다. 또한 해외 프로리그 진출은 대만에서 활약한 한희민이 먼저다. 따라서 선동열이 최초인 것은 KBO 리그에서 데뷔한 뒤 NPB로 간 부분이 된다.
[30] 서정환의 경우 선동열처럼 해태 선수 출신에 삼성과 KIA의 감독을 맡았고 삼성 시절에 더 잘했다. 물론 서정환은 투수 혹사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성적도 선동열보다 더 못 냈기에 삼성 감독 워스트는 몰러도 역대 감독 워스트에 선동열은 절대로 들어가지 않지만 서정환은 역대 감독 워스트에 언급된다. 애초에 KIA 서정환은 07 KIA의 원흉인 2000년대 리그 최악의 감독 중 하나이며 현재까지도 정재공, 장정석, 김종국과 함께 팀 금지어 순위로도 톱에 꼽힌다.
[31] 게다가 선동열이 우승하던 그 시기 삼성은 비싼 돈을 들여서 박종호(2루수), 박진만(유격수), 심정수(외야수 겸 지명타자)를 사서 모으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32] 사실상 투수진 운영 전권은 선동열이 하게 되었다.
[33] 선동열의 감독 실적을 저평가하는 사람들은 이 때 우승은 삼성이라 가능했다고 한다.
[34] 대표적으로 이 시기 삼성의 주축 투수진이었던 배영수, 권오준, 권혁 등은 선동열 감독 시절 한 번씩 수술대에 올랐다.
[35] 양준혁, 김한수의 은퇴 종용과 이승엽 복귀 거부 등. 이외에도 박한이, 임창용을 대놓고 홀대하는 등의 행동을 저질렀다.
[36] 선동열이 감독 시절 오승환이 자기보다 멀었다고 말한 것이나, 박찬호에게 팔각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의 행동은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에서 기인한 게 크다.
[37] 때문에 선동열은 슬라이더를 손목을 비틀지 않고 던졌다.
[38] 본인말에 따르면 진구구장이 (구속이) 좀 높게 찍혀라고 말했다.진구구장이 좀 높게 찍혀
[39] 비공식적으로 1995년 lg전에서 lg측 스피드건으로 155km가 관측된 적도 있으나 해태 스피드건에는 151km가 찍혀 신뢰하기가 힘들다. 선동열 '다시 돌아왔다'
[40] 다만 최동원의 전성기는 고교/대학의 아마 시절이라는 게 중론이다. 최동원의 기량 저하는 대학 시절 선배 박철순에게 당한 폭행으로 인한 허리부상과 아마와 프로 시절의 어마어마한 혹사가 원인이었기 때문에 프로가 일찍 생겼더라도 아마 시절의 부상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박철순이 이 폭행으로 인해 해외로 나가게 된다. 당시 국가의 최고 에이스를 폭행해서 부상을 입힌 데 따른 책임을 진 것이다.
[42] 서민 교수가 본인 블로그에 선동렬 결혼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43] 宣判奎. 1921~2006, 당시 광주 송정동에서 송정여관과 목욕탕을 운영하며 그 지역 유지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44] 이 오소리를 먹는 방법부터 범상치가 않았다. 먼저 살아있는 오소리의 목을 따면 냉면 대접을 두 그릇 정도 채우는 피가 나오는데 그걸 바로 한번에 들이킨다. 그리고 생간과 쓸개를 기름소금에 찍어 먹고 남은 고기와 뼈는 한약재를 넣고 푹 고아서 그 국물을 마시는 것인데, 선동열이 밝히길 "몸에 좋다고 이런저런 음식을 많이 먹었지만 오소리만큼 역겨운 것도 없더라. 하지만 아버지의 정성을 생각해서 꾹 참고 전부 목구멍으로 넘겼다".
[45] 해태 타이거즈의 초대 감독인 김동엽 또한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에 갓 잡은 노루 등의 생피를 섭취하곤 했다고 한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종모가 선동열의 누나가 가져온 보온병에 담긴 보양식(푹 끓인 곰국 같은)을 먹어봤는데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고 술회했다. 이 일화들은 하도 유명해서 영화 스카우트에서 선동열의 모친이 뱀을 고아 뱀탕을 끓이고 임창정이 그걸 보고 놀라 기겁하는 장면이 나왔다.
[46] 당시 영남대 2학년이던 방수원은 학교가 있는 대구로 올라갈 수 없게 되어 갈 곳 없이 헤메다가 선판규 씨가 그를 거두어 주면서 여관에 묵고 있었다.
[47] 방수원의 회고에 의하면 광주일고 선수가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그 친구가 그랬다고 한다.
[48] 방수원을 위협하던 계엄군은 방수원에게 "너 임마, 용궁 갔다온줄 알아" 라면서 물러났고, 군인들이 철수한 후 선동열의 어머니가 죽다 살아난 방수원을 달래려고 딸기를 한바구니 씻어 내왔지만 정작 방수원은 딸기는 손에 대는둥 마는둥 하며 한동안 허공만 바라보았다고 한다.
[49] 나중에 해태에서 선수 말년을 보내던 방수원이 거꾸로 선동열에게 그 슬라이더 어떻게 던지는 거냐며 물어봤다고 한다.
[50] 정확히는 5촌조카의 딸이다. 선동열은 형이 16살에 요절했기 때문에 친조카가 없다.
[51] 이승엽도 마찬가지로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한다.
[52] 선동열이 해태 선수 시절에는 단 한번도 한국시리즈에서 꼴찌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간 사람들이라면 저 정도 마인드가 없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일일 것이다.
[53] 사실 대부분 현역 타자들을 대상으로 한 내용이었지만 머리 좋은 선동열은 순간적인 판단으로 은퇴 선수들만 주워섬긴 것이었다.
[54] 오죽이나 말술로 당대에 유명했던지 스카우트라는 영화의 OST에는 선동열배 술먹기 대회라는 노래까지 실려있다.
[55] 그래서 훈련때 휴식을 줄법 한데 안 주면 선동열이 총대를 매어 꾀병을 부려 휴식을 얻어냈다고 한다.
[56] 어느날 양승호가 훈련 시간보다 일찍 야구장에 들어왔는데 그 이유가 낮잠 좀 자려고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응용 감독이 불쑥 찾아오더니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술 마시고 뻗은 거냐고 갈궜다고 한다.
[57] '낮잠을 집에서도 자면 되지, 왜 집에서 안 자고 거기서 자?'라고 말할지도 모르나 잘 생각해보자. 야구 시즌은 여름이 주가 된다. 요즘이야 에어컨과 선풍기가 있지만 양승호가 현역으로 뛰던 시절 에어컨과 선풍기가 보편화가 되어있지 않던 시절이다. 양승호가 말하길 무등구장엔 바람이 솔솔 잘 통하는 정자 하나가 있었다고. 거기가 시원해서 잠이 잘 왔다고 한다.
[58] 해태 내에는 주당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20-20클럽이라고, 소맥을 섞은 폭탄주 20잔과 위스키 샷 20잔을 마시는 선수가 셋 있었다고 한다. 선동열과 박세혁의 아버지로 유명한 박철우, 그리고 정해영의 아버지 정회열이었다고 한다.
[59] 사실 허재는 법 규정이 허술했던 과거에 저래서 지금도 활동할 수 있는 것이지 현대 기준으로 저렇게 음주사고를 많이 쳤으면 방송은 물론이고 농구도 그만둬야 한다.
[60] 과도한 음주로 생긴 혈관이 막힌 혈행 장애, 숙취로 몸 안 풀고 무리하게 나서다 어깨 부상 등이 있다.
[62] 사실 이 시기에는 대부분의 광고가 성우의 더빙을 많이 사용했다. 요즘과 달리 녹화+녹음이 따로인 데다, 출연 배우 본인도 발성능력 부족이나 빡빡한 스케줄 등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본인 목소리로 녹음한 광고는 1992년 대우전자 수퍼 디지탈 셔틀 VTR 광고와 2001년 삼성증권 fn 아너스클럽 광고 두 편이다. 참고로 인터뷰 등을 보면 실제 선동열의 목소리는 서남 방언과 억양이 있음에도 의외로 괜찮은 편이다.
[63] 그리고 광고 끝날 때의 멘션이 '잘 생긴 제 코를 기억해주세요'였다.
[64] 둘리와 도우너가 개조자동차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던 중 잠실구장 상공을 지나게 되는데, 마침 도우너가 선동열의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지른다.
[65] 이종범이 아는 형님과 스톡킹에서 직접 증언한 내용이다. 아는 형님은 TV방송이라 개새끼들은 안했지만, 유튜브인 스톡킹에서는 했다.
[66] 단, 육회 장염 사건 때도 이 시즌인데, 이종범이 "감독님 저 진짜 경기하다가 똥 쌀 거 같습니다."라고 말하고 하루만 경기를 빼 달라고 요청했을 때, 장염인 것도 다 알던 김응용이 "야 이 새끼야 그냥 나가서 서 있어"라고 말하고 억지로 출전시킨 게 이 음반의 영향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요즘 기준이 아니라 당시 기준이긴 하지만, 원래 김응용은 잘하는 선수들은 최소한의 배려를 해주는 편인 감독이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있다. 선동열이야 한국 원톱 투수니까 당연했고, 심지어 80년대에는 전날 술을 퍼 마시고 왔는데 일단 엔트리에 넣었더니 놀랍게도 1경기에 3안타를 친 선수가 있자, 경기 승리 후 혼내려던 코치가 혼내지도 못하게 했다고 한다. 오히려 "야 너 속 안 쓰리냐? 오늘은 술 먹지 말고 쉬어라"라고 말하고 그냥 숙소로 보냈다고 한다.
[67] 어뮤즈월드의 전신인 데니암에서 현지화해 '한국프로야구98'이라는 게임으로 한국 시장에 발매한 바 있다.